“한 마을 파탄내놓고 반성은커녕…”
농약사이다 살인사건 용의자 박 할머니가 7일 국민참여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대구지방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11일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후에도 “내가 하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연합뉴스
지난 11일 오전 10시 대구지방법원 11호 법정. 피고인 대기실 문이 열리자 법정을 가득 채운 방청객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굽은 허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연초록색 죄수복을 입고 재판장에 들어온 것.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은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방청석에 앉은 자신의 가족을 힐끔 보고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는 피고인석 의자 대신 조용히 바닥에 앉았다.
피고인은 박 아무개 씨(여·83). 그는 지난 7월 14일 오후 2시 43분께 경북 상주시 공성면 금계리 한 마을회관에서 사이다에 고독성 농약을 몰래 넣어, 이를 나눠 마신 할머니 6명 가운데 4명을 중태에 빠뜨리고 2명을 숨지게 한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건 당시 마을회관에는 박 할머니를 비롯해 7명만 있었다. 경찰은 사이다병에 농약이 들어있었다는 점에서 고의성이 있다고 판단해 수사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일 만인 지난 7월 17일, 경찰은 쓰러진 할머니들과 마을회관에 함께 있었으나 유일하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박 씨를 용의자로 체포했고 같은 달 20일 구속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지난 8월 13일 살인·살인미수 혐의로 박 씨를 구속기소했다.
일명 ‘농약 사이다 사건’으로 불리는 이번 재판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단은 일찌감치 치열한 법정공방을 예고했다. 박 씨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검찰이 수집한 자료만 3500여 쪽에 이르렀다.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변호인단이 법정에 제출한 증거 자료만 무려 583건에 달했다. 또한 양측은 최초 신고자, 피해자, 마을 주민, 행동분석 전문가, 사건 수사 경찰관, 외부 전문가 등 총 18명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 때문에 이번 국민참여재판은 국내 단일사건 중 최장기간(5일) 열린 재판으로 기록됐다. 또한 최종 선고일을 포함해 하루 평균 12시간여 동안 재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박 씨가 메소밀(고독성 농약)을 할머니들이 나눠 마신 사이다 병에 넣었느냐’였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박 씨가 △사건 전날 화투를 치다가 심하게 다퉜다는 피해자 진술 △피고인 옷과 전동휠체어, 지팡이 등 21곳에서 메소밀 성분이 검출된 점 △박 씨 집에서 메소밀 성분이 든 박카스 병이 나온 점 △범행 은폐 정황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 △사건 당일 박 씨가 마을회관까지 가는 동선이 평소와 달랐던 점 등을 증거로 제시하며 박 씨의 유죄를 자신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검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범행 동기, 농약 투입 시기, 고독성 농약 구입경로, 박카스 병에 피고인 지문이 묻어있지 않은 점 등을 바탕으로 직접 증거가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반박했다. 변호인단은 지난 7일 열린 첫 공판부터 검찰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고 “박 씨는 억울한 누명을 쓴 또 다른 피해자”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국민참여재판이 벌어진 닷새 동안 언론과 시민들의 이목이 대구지방법원으로 쏠렸다. 아래는 11호 법정.
이후 사건 당일인 지난 7월 14일, 박 씨는 집에 있던 메소밀(농약)을 박카스 병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박 씨는 평소와는 달리 마을회관 반대 방향에 있는 민 씨 집에 들러 회관 방문 여부를 묻고 먼저 길을 나섰다. 검찰은 “이는 범행을 저지르기 전 민 씨가 회관에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마을회관에 도착한 박 씨는 냉장고에 있는 사이다 페트병에 농약을 담았고, 이후 민 씨를 포함한 6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감자를 깎았다. 이 과정에서 박 씨를 제외한 할머니들이 사이다를 나눠 마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자 가운데 가장 어린 신 아무개 씨(여·65)가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를 느껴 밖으로 뛰쳐나갔고, 박 씨는 그를 따라 회관 앞으로 나갔다.
당시 마을회관 인근을 지나다 신 씨의 이상 증세를 본 마을 이장의 부인은 신 씨가 중풍에 걸린 것으로 착각, 119에 신고했다. 박 씨는 이장의 부인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긴급구조대원에게 “신 씨가 사이다를 마시고 저런다”는 말을 했지만 마을회관 내부에 다른 할머니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이런 박 씨의 사건 당시 행동을 범행 은폐 행위로 판단했다. 박 씨는 신 씨를 후송하기 위해 출동한 1차 구조대가 떠난 뒤, 마을회관 문을 닫았다. 이후 신 씨 소식을 듣고 마을 이장의 자녀들이 달려왔을 때도 박 씨는 회관 현관문 앞 난간에 걸터앉아 “너희 할머니는 뭐하시노. 마을회관 놀러 오라고 해라”라고 태연하게 말을 걸기도 했다.
이후 신 씨의 상황을 들은 마을 이장 황 아무개 씨가 마을회관을 방문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관에 들러 닫혀 있는 대문을 열었다가 쓰러져 있던 5명의 할머니를 발견했다.
검찰 주장을 보면, 박 씨는 마을 이장 황 씨가 달려와 마을회관 안에 쓰러져 있는 5명의 할머니를 발견하고 신고할 때까지인 사건 발생 50여 분 동안 별다른 신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남아있던 5명의 피해자들은 거품을 뿜어내며 고통스럽게 의식을 잃어갔다.
또한 메소밀 성분이 들어간 뚜껑이 없는 박카스 병과 메소밀 농약병이 박 씨의 집 마당에서 발견된 점은 결정적인 단서로 재판부에 제출됐다. 검찰은 “박 씨의 자택 내부에 있던 마시지 않은 박카스와 쓰레기통에 있던 박카스 병,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입수한 박카스 병 등을 포함하면 모두 10개(한 박스)가 되고 제조일자까지 동일한 ‘한 박스에 담겨있던 제품’”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 씨 집에서 압수된 농약 성분이 들어있던 박카스 병은 뚜껑이 없어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사이다병의 뚜껑(박카스 뚜껑)이라는 이야기도 성립이 된다”고 설명했다. 사건 발생 당시 할머니들이 나눠 마신 사이다병은 사이다병 뚜껑 대신 박카스병 뚜껑으로 닫혀있었다.
지난 7월 사건이 벌어진 마을회관.
여기에 검찰은 박 씨의 옷과 지팡이, 전동차 등 21군데에서 메소밀 성분이 광범위하게 검출된 것에 대해 “박 씨가 농약을 박카스 병에 옮기거나 사이다에 농약을 섞는 과정에서 박 씨의 손에 농약이 묻었고, 결국 나머지 물건에도 성분이 옮겨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검찰 주장에 맞서 박 씨에게 적용된 모든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찰이 박 씨가 한 행동 모든 것이 목적이 있어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심리학적 확정편향’이 있다”며 “모두 억측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변호인단은 “박 씨와 앞서의 민 씨가 사건 전날 화투를 치다가 다퉜다는 것은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없다. 박 씨를 포함한 할머니들은 수십 년 동안 마을회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화투를 쳤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 속이고 다투고 하는 것 자체가 ‘재미’”라고 설명했다. 변호인단은 이를 근거로 “한 판에 10원을 딸 수 있는 화투 때문에 감정이 상해 한 마을에서 가족처럼 지내왔던 친구를 살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냐”고 주장했다. 이어 “박 씨가 설령 민 씨를 살해하려 했다면 마을회관이 아닌 혼자 사는 민 씨 집에 찾아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 쉽고 편안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변호인단은 메소밀 병, 메소밀이 유출된 사이다 병과 박카스 병에서 박 씨의 지문이 검출되지 않은 점을 근거로 “박 씨가 지문을 지웠을 정도로 치밀했다면 검찰이 주장한 앞서의 허점들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박 씨가 핸드폰으로 신고를 하지 않은 것도 전화를 받기만 할 뿐, 먼저 전화를 거는 것은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5번에 불과할 정도로 사용도가 낮다”며 “이는 박 씨가 신고를 하는 등 핸드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을 뜻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변호인단은 박 씨의 옷이나 물품에서 메소밀이 나온 것은 피해자들의 1차 분비물, 즉 ‘메소밀이 몸에 흡수된 이후에 나온 구토물’이 아닌 초기에 피해자의 입안에서 나온 액체에서부터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박 씨가 범행 이후 마을회관으로 들어가 휴지(메소밀 미검출)와 노란 걸레(메소밀 검출)로 피해자들의 입 주변과 바닥을 닦았고, 이 과정에서 메소밀이 박 씨의 손에 묻어, 이후 바지나 지팡이, 전동차 등으로까지 옮겨갔다는 이야기다.
변호인단은 “검찰 설명대로라면 박 씨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현장에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고, 불안한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고 웃기까지 한 사람이다. 이는 악마나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며 “그렇다면 검찰은 피고인의 정신 감정부터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직접 증거는 단 하나도 없이 검찰은 간접 증거와 정황 증거만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다. 합리적 의문점도 너무 많다”고 주장했다.
박 씨 역시 지난 10일 4일차 재판에서 진행된 피고인 신문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날 검찰은 박 씨에게 평소와 다른 경로로 마을회관에 갔던 점, 사건 당일 혼자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점 등 140여 개의 질문을 쏟아내며 2시간 42분 동안 박 씨를 압박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박 씨는 검·경 수사 과정에서 진술하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검찰이 박 씨에게 “최초 신 씨가 마을회관 바깥으로 나가 쓰러졌을 때 ‘휴지로 거품을 닦아 주며 피해자 구호 조치를 했다’고 진술했는데, 그 휴지는 어떻게 했느냐”고 질문하자 “신 씨 입을 닦고 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와서 화장실에 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씨의 바지 주머니에서 신 씨의 타액 등 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다음 날인 11일 검찰은 최종 의견진술에서 “증거가 충분함에도 반성은커녕 범행을 부인하고 피고인이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도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사건으로 마을이 파탄난 점 등을 함께 고려해 박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한다”고 말했다.
박 씨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재판장의 말이 끝나자 최후 진술을 시작했다. 박 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눈으로 똑똑히 보지도 않고 순경이 (나를) 여기로 잡아넣었다. 이게 제일 억울하다”며 “잠도 못자고 살이 벌벌 떨린다. 잡혀 들어가서 고생한 거 생각하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6시께, 최종 선고를 앞두고 두 명의 예비 배심원을 제외한 7명의 배심원은 평의에 들어갔다. 평의는 장장 5시간여 동안 진행됐는데, 법정 바깥에서 대기 중인 일부 피해자 가족과 피고인 가족이 언성을 높이는 등 작은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오후 10시 50분께, 선고를 위해 법정 문이 열렸다. 피고인 가족들은 재판부의 판결을 기다리며 초조한 듯 거친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박 씨에 대해 “다른 피해자들이 자는 것으로 생각해 구조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직접 침을 닦아 줬다고 주장한 신 씨의 증상 발현 시점에는 다른 피해자들도 증상이 발현됐을 가능성이 커 이들이 자는 것으로 봤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어 “그동안 수사기관에서는 진술하지 않았던 ‘휴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화장실에 버렸다’는 진술을 재판 4일차 피고인 신문에서 말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으로 보인다”며 “박 씨의 주장이 대부분 사실이 아닌 점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고, 검찰의 객관적 증거를 반박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던 두 명을 살해하고, 네 명은 위험한 상황까지 가는 등 죄가 무겁고, 농약을 미리 준비한 점, 구조 기회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등이 유족에게 평생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을 줬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함께 살던 마을은 신뢰가 무너져 공동체 붕괴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박 씨가 임기응변으로 변명하고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7명의 배심원도 만장일치로 유죄로 판단,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선고가 끝나자 박 씨는 “내가 하지 않았다”고 외쳤다. 방청석에 있던 피고인 가족은 곳곳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일부 피고인 가족은 재판부를 향해 “그건 아니지, 말도 제대로 못하는 80 먹은 노인네가 어떻게…”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한 마을에서 동고동락하다 법정에서 만난 피해자와 피고인 가족들은 모두 한참 동안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