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여신’ 되려다 ‘수구’로 찍힌다
▲ 박근혜 대표가 지난 13일 명동 인근에서 사립학교법 통과 무효를 주장하고 있는 모습. 이날 영하 10℃의 한파를 무릅쓴 박 대표의 모습에서 확 달라진 강경한 자세가 엿보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강행처리(9일)된 것에 반발, 박 대표 주도하에 한나라당이 국회를 박차고 나가 장외투쟁에 돌입하면서다. 내년도 예산안과 8·31 부동산종합대책, 비정규직 관련 법안 등의 처리를 위해 임시국회가 열리고 있지만 박 대표는 이를 외면하고 “전교조에 우리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며 엄동설한의 거리로 나선 상황이다.
박 대표는 12일부터 시작된 사학법 무효화 장외투쟁을 앞장서서 이끌며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당 안팎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평소 절제된 발언과 행동으로 정평이 난 박 대표였지만, 이번엔 당내의 비판론에 대해 직설적으로 반박하는가 하면 여권에도 원색적 비난을 퍼부으며 소속 의원들에게 투쟁을 요구하고 나섰다. 박 대표의 이 같은 ‘투사적’ 모습에 당내에선 “이제야 제대로 된 야당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긍정론과 “이념적 한계를 드러내며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평가가 교차하고 있다.
'달라진' 박 대표의 모습은 무엇보다 비타협적인 태도에서 도드라진다. 박 대표는 지난해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민주화유공자 인정 논란 등 이른바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선 강경보수의 면모를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념적 색채가 옅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이번 사학법 파동 과정에서 ‘헌법정신 훼손’을 거론하며 장외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왜 저러느냐”며 의아해 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실제 박 대표는 장외투쟁 과정에서 사학법 논란을 ‘이념 대결’ 구도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열린우리당은 교육과 아이들의 미래, 헌법 정신까지 날치기했다. 이제 모든 사립학교가 ‘전교조 사학’이 되어 영문을 모르는 우리 아이들이 반미를 외치고 북한의 집단체조 아리랑을 보며 탄성을 지를 것이다. 학교가 이념과 정치투쟁의 장이 되고 파업과 시위로 뒤덮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12일 명동 아바타몰 앞 집회), “전교조는 대한민국 역사와 자유민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단체이며 반미와 친북을 주입시키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서슴지 않는 집단이다. 한 마리 해충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일 수 있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15일 영등포역 앞 집회)는 등의 발언을 쏟아낸 것이 단적인 예다.
박 대표가 ‘색깔론’ 시비에도 불구하고 ‘이념 드라이브’를 걸고 나선 배경은 뭘까. 한 측근은 “박 대표가 사학법 무효화 투쟁을 통해 보수세력에 자신의 카리스마를 확실히 심어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원희룡 의원 | ||
박 대표가 이같이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장외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리란 분석은 당 내외 비판세력에 대해 ‘초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 대표는 15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어제(14일) 한나라당 의원 한 분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외집회에 반대하는 의원이 절반을 넘는다고 했는데 (장외투쟁은) 의총서 결정된 사항이다. 만약 의원 중에 과반 이상이 반대한다면 지금이라도 대표 직권으로 중지하겠다”고 말해 주목을 끈 바 있다.
박 대표의 이 발언은 고진화 의원이 평화방송 인터뷰에서 “장외투쟁에 반대하는 의원이 당내 과반 정도는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을 겨냥한 것. 자신과 뜻을 달리한다 해도 소속 의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가급적 피해왔던 박 대표의 기존 ‘화법’(話法)과 비교하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박 대표는 또 비주류를 중심으로 한 ‘등원론’에 대해서도 “명분을 찾으면 (장외투쟁을 끝내고 국회에) 들어가야 되지 않느냐 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할 거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았어야 되는 일이다”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이를 두고 한 핵심 당직자는 “지난 연말 국보법 수호 투쟁 때보다 박 대표가 더욱 더 강경한 것 같다”며 “박 대표의 ‘결기’에 놀란 비주류들이 박 대표 앞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피력하지 못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그러나 지금의 ‘장외 정국’이 박 대표에게 과연 ‘남는 장사’가 될 것인지에 대해 회의론도 적지 않다. 오히려 박 대표 본인의 리더십 손상은 물론 당에도 ‘수구 꼴통’ 이미지를 더욱 더 분명히 각인시키는 우를 범할 것이란 시각도 만만찮다.
비판론자들은 우선 박 대표가 사학법 개정을 ‘전교조의 사학 장악 지원’, 나아가 ‘국가정체성 훼손’으로 규정하고 장외투쟁에 나선 데 대해 “명분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법안 처리 직전까지 ‘사학법 개정안-자립형 사립고법 동시처리’를 조건으로 여당과 협상하다가 사학법 개정안만 통과되자 급작스레 이념공세를 펴는 것도 문제라는 비판에다, 내년 5·31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당의 외연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색깔론’인 지금의 투쟁노선을 계속 유지할 경우 ‘수구 꼴통당’의 이미지가 고착화돼 중도세력 영입에 장애가 된다는 점도 거론하고 있다.
당내 소장파들은 물론 중도적 성향의 의원들의 시각도 원 최고위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당의 일방적인 강행처리를 막지 못한 점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위성’ 이벤트로 항의 및 내부 결속을 강화할 필요는 있지만, 민생현안이 산적한 마당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은 아무리 봐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박 대표 등 지도부는 사학법 찬반에 대해 여론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주장에는 맹점이 있다. 만약 여론조사상 사학법 반대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아마 80% 이상은 ‘잘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찬반 논란의 대상이 사학법에서 장외투쟁으로 넘어가는 순간 한나라당은 급격히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도 성향의 한 당직자도 “이번 싸움은 애초부터 여당이 유리한 이슈다. 교육 문제에서 이길 수 있는 이슈가 많은데 왜 불리한 전장에서 싸우는지 모르겠다. 합법적인 교원 노조에 대해 ‘반미-친북-좌파’로 규정해 대립 전선을 형성하는 것도 문제다”라며 박 대표의 정국 운영에 대한 반발 기류에 가세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