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봉변 욕설파문 혹독한 ‘첫경험’
▲ 지난 13일 명동에서 장외투쟁을 벌이는 한나라당 의원들. 치켜올린 팔 동작이 왠지 어설퍼 보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스스로 ‘웰빙(Well-being)당’, ‘온실속의 화초’라는 자조 섞인 표현을 사용할 만큼 ‘곱게 자란’ 의원들이 12월 중순부터 국회를 등진 채 엄동설한의 거리에서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이 ‘사학법 재개정 약속’ 등 등원을 위한 명분을 좀처럼 내줄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이러다 거리에서 새해를 맞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가운데 ‘난생 처음’ 겪는 고생인 터라 갖가지 에피소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이 처음으로 장외투쟁에 나선 12월13일 서울 명동 아바타 몰 앞. 박근혜 대표가 “열린우리당은 교육과 아이들의 미래, 헌법정신까지 날치기했다”며 열변을 토하는 가운데 60여 명의 의원들이 투쟁에 동참했지만 정작 ‘전교조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구호를 제창하는 순간에선 어색한 장면이 연출됐다. 상당수 의원들이 구호는 외쳤지만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서울지역 한 초선 의원에게 ‘왜 손을 올리려다가 마느냐’고 물었더니 “대학 다닐 때도 이런 경험을 안해 봤는데 처음 하려니 영 어색하다”며 겸연쩍어한다. 평소 민주화운동에 ‘한몫’했다 자부해온 수도권 재선 J의원은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판·검사나 변호사, 박사 출신들이 주류인 한나라당에서 이제껏 구호 한 번 제대로 외쳐본 의원들이 몇이나 되겠느냐.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의원들 중 상당수는 그동안 ‘불순한 짓’이라고 여겼던 일을 자신이 하려니 당혹스러울 법한 것 아니냐.”
사흘 뒤(16일) 시청 앞 집회에서 J의원을 다시 만났더니 묘한(?) 얘기를 건넸다. “의원들이 ‘장외투쟁 모드’에 급속히 적응해가는 것 같다. 이제는 구호를 외칠 때 팔놀림도 그럴싸해졌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딴 것은 몰라도 ‘학습능력’ 하나는 대단한 것 같다.”
추운 날씨에 거리에서 시민들을 상대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일들도 속출하고 있다. 곽성문 의원은 12월15일 신촌 일대에서 집회를 마치고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느닷없이 시민에게 뒷머리를 가격당해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돌발 사태’에 놀란 주변 인사들은 가해자를 서둘러 경찰에 인계했는데 다행히 곽 의원의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은 데다 본인이 선처를 요청해 문제의 시민은 훈방됐다는 후문.
곽 의원처럼 ‘봉변’을 당하진 않았지만 혹한의 거리에서 집회를 계속하다 보니 건강에 이상이 생긴 의원들도 한둘이 아니다. 12월16일 서울시청 앞 집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한선교 의원은 장시간 추위에 떨고 난 뒤 평소 좋지 않았던 허리상태가 악화돼 치료를 받고 있고, 김태환 사무부총장은 팔 근육통에 시달렸다. 이밖에 권영세 의원 등 10여 명의 의원이 감기몸살에 시달리고 있으며 ‘총동원령’이 발동된 보좌진들 중 감기환자는 부지기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인물 배포 등 ‘홍보전’에 동원된 의원들 가운데선 인기도에 따라 시민들의 호응이 백팔십도 다른 경우도 벌어져 눈길을 끌고 있다. 거리집회에 참여한 의원들의 전언에 따르면 최고의 스타는 이른바 ‘얼짱 의원’으로 알려진 나경원 의원. 나 의원이 신호대기중인 차량에 접근하면 해당 운전자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유리창을 내려 홍보유인물을 받아간다고. 어떤 운전자는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고생한다”며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한다.
반면 서울에 지역구를 둔 남성 초선 L의원은 나 의원 바로 옆에서 홍보전을 벌여도 반응은 전혀 딴판이어서 주위의 ‘동정’을 샀다. L의원은 “운전석 유리창문을 두드려도 좀처럼 문을 내리지 않아 무안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저 나 의원이 부럽기만 할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기도.
장외투쟁과 함께 병행하고 있는 국회의장실 점거투쟁 과정에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들이 연출돼 가뜩이나 떨어지는 투쟁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 대표와 함께 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이규택 ‘사학법 무효투쟁 및 우리 아이 지키기 운동본부장’의 의장실 주류 반입 논란이 대표적이다. 평소 ‘애주가’로 알려진 이 본부장이 릴레이 농성에 지친 소속 의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양주 등을 들이려다 의장실 관계자들과 공방을 벌인 것.
이 본부장은 의장실의 이 같은 비난에 “요즘 연말이고 식사 때 누구나 반주를 한다. 그걸 음주로 몰아붙인다. 도대체 반주가 (의장검거 투쟁의) 본질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오히려 개탄해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당내에서는 이 본부장이 사학법 무효화 투쟁을 ‘구국운동’이라고까지 강조했음에도 실제론 엉뚱하게 투쟁의 명분과 정당성을 훼손시킨 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사학법이 통과됐을 때 폭탄주를 마시고 기쁨조와 광란의 춤을 췄다”(16일 서울시청 앞 집회)는 등 근거불명의 주장을 펼친 것과 관련해서도 “이 본부장이 ‘빅 마우스’(Big Mouth)인지는 알았지만 저렇게 뒀다 또다시 사고치지나 않을까 두렵다”(핵심 당직자 C의원)는 반응도 나온다.
임인배 의원이 의장실 여직원에 ‘폭언’을 퍼부었다가 열린우리당 여성 의원들에 의해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된 것도 지도부로선 ‘가리고 싶은’ 장면이다. 임 의원은 12월19일 의장실 점거농성 중 자신의 비서관이 가져온 서류를 전달받는 과정에서 의장 비서실 여직원이 자신을 밖으로 불러내자 화를 내면서 “버르장머리 없는 X들”, “싸가지 없는 X들” 등 욕설을 해 파문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임 의원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초기엔 “(국회의장) 비서들이 물건도 전해 주지 않는 등 너무한 것 같아 혼을 내줬을 뿐”이라고 해명했으나 사태가 확산되자 12월22일 김덕배 국회의장 비서실장에게 유감을 표시했다. 한나라당은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태로 의장실 점거농성이 구설수에 오르자 12월23일 전격적으로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이미 부정적 파장은 박 대표에게까지 미쳐 “공주님이나 상궁 나인이나 무수리나 똑같은 인권을 보장받고 있다. ‘공주님’ 받드는 데 급급해 아랫사람 비하하는 일을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다”(김현미 열린우리당 의원)는 비아냥을 들은 후였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