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원 수억원도 20cm 상자 안에 ‘쏙’
지난주 구속된 민영진 전 KT&G 사장이 받은 ‘뇌물 리스트’에도 역시나 명품 시계가 등장했다. 민 전 사장이 받은 시계는 4000만 원 상당의 스위스 명품 ‘파텍 필립’. 1839년 스위스에서 탄생해 17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텍 필립은 수많은 명품 중에서도 명품으로 손꼽히는 브랜드다. 명품 시계가 ‘뇌물 트렌드’를 선도하게 된 까닭을 짚어봤다.
민영진 전 KT&G 사장이 재임시절 협력업체로부터 3000만 원가량의 현금과 4000만 원대 스위스 명품 시계 2개를 받은 정황이 포착됐다. 왼쪽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임준선·최준필 기자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검사 김석우)는 민영진 전 KT&G 사장이 재임 시절 자녀 결혼식 축의금 명목으로 협력업체로부터 3000만 원가량의 현금을 받은 사실과 함께 러시아의 담배 유통업자로부터 4000만 원대의 스위스 명품 시계 파텍 필립 2개를 받은 정황도 포착했다.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민 전 사장은 “대가성이 없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지만, 법원은 시계가 오고 간 당시 정황과, 민 전 사장이 시계를 받은 뒤 KT&G 측이 시계를 건넨 러시아 업자에게 유리한 거래 조건을 허락한 점을 고려해 구속을 결정했다.
이처럼 명품 시계를 선물(뇌물)로 주고받는 일은 비단 경제계 인사들만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관계 뇌물 사건에서 더 자주 등장한다. 지난 15일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이 선고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2006년 전군표 당시 국세청장에게 30만 달러(약 3억 3500만 원)를 뇌물로 주면서 4200만 원 상당의 ‘프랭크 뮬러’ 시계도 함께 건넸다. 이재현 회장은 천재 시계 제작자로 손꼽히는 프랭크 뮬러의 시계를 선물로 선호한 듯하다. 이 회장은 허병익 당시 국세청 법인납세국장에게도 2700만 원 상당의 프랭크 뮬러 시계를 건넸는데, 이 회장은 이들에게 선물할 시계들을 직접 매장에서 현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올해는 박기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명품 시계 애호가 리스트에 이름을 새롭게 올렸다. 최근 등장한 명품 시계 뇌물 사건 중 개수나 가격의 규모가 가장 크다. 박기춘 의원과 박 의원 가족들이 분양대행업자로부터 받은 명품 시계는 모두 9개. ‘해리윈스턴’ ‘위블로’ ‘브라이틀링’ 등 개당 3000만~4000만 원에 달하는 명품 시계들을 받아 챙겼다.
이재현 CJ 회장(왼쪽), 박기춘 의원
명품 시계를 뇌물로 주고받는 일은 우리나라만의 트렌드가 아니다. 올해 초 불거진 ‘FIFA(국제축구연맹) 비리’에선 영국 축구협회장이 3000만 원짜리 시계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고, 카타르 왕족이 남미 축구계 거물들에게 황금 시계를 뿌렸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처럼 명품 시계가 항상 주요 사건의 ‘뇌물’로 등장하는 이유는 우선 가격대가 다양하다는 장점 때문이다. ‘티솟’ 등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시작하는 명품 시계 브랜드는 가격대를 위로 올리면 수억 원에 달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620개가 넘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엑스칼리버 더블플라잉 투르비용 스켈리턴’이라는 시계는 4억 원에 달하고, 민영진 전 KT&G 사장이 받은 파텍 필립 중에는 가격이 6억 원에 달하는 모델도 있다. 시계를 건네는 쪽에서 ‘상대방의 격’에 맞게 맞춤형으로 뇌물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명품 시계는 생산량이 한정돼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명품들은 생산량이 워낙 적어 세월이 지나도 값어치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량이 아주 적은 몇몇 상품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이 오른다. 급전이 필요한 경우 부동산이나 자동차보다 환금성도 좋다. 상속과 증여가 자유롭다는 것도 특징이다. 명품 시계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재테크 방법으로도 이용되는 상황. 아들·손자까지 대대로 물려주기 더 없이 좋다.
구매 과정과 전달도 용이하다. 특히 현금으로 결제할 경우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 건넨 사람과 받은 사람만 입을 다물면 시계가 오고 간 정황을 잡아내기가 어렵다. 휴대가 간편해 운반도 쉽다.
받는 입장에서 보면 액세서리가 시계 정도인 남성 고위직 인사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박기춘 의원에게 명품 시계를 건넨 분양업자는 “격에 맞는 시계를 차셔야 하지 않느냐”며 3120만 원 상당 해리 윈스턴을 선물했다. 받는 입장에서 ‘격’을 챙겨주는 기분이 들 수 있는 선물은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건네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시켜줘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시계의명ㅍ 효과는 상당하다. 명품 시계 애호가가 아니라면, 직접 수천만 원 상당의 시계를 자기 돈으로 구입하기는 부담스럽지만 선물로 받을 경우 고마움은 배가 된다.
게다가 매일 착용하는 시계를 볼 때마다 선물을 준 사람을 기억나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 시계에 정통한 사람들은 ‘어떤 시계를 차고 있느냐’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런 이에게 좋은 평가를 들을 경우 선물을 건넨 이에 대한 고마움은 ‘배’가 된다고 한다. 특수 수사에 밝은 한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과거에 현금을 직접 주고받는 뇌물이 횡행했다면 앞으로는 받는 사람의 격까지 생각하는 명품 시계가 더 자주 등장할 겁니다. 주기도 좋지만, 받는 입장에서도 정말 고마운 선물이거든요. 매년 수사를 할 때마다 새로운 브랜드가 등장하는 걸 보면 명품 시계는 정말 종류가 다양한 것 같습니다. 매번 수사를 할 때마다 이런 브랜드도 있구나 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품 선물은 그 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큰 뇌물이 된다. 죄도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번쩍이는 명품 시계가 언제든 ‘은팔찌’로 둔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수사당국도 고위층의 손목을 주시하고 있다.
남윤하 언론인
뇌물 시계 증거력은? ‘대가’ 정황 있어야 유죄 영화 <부당거래> 한 장면. 명품 시계를 뇌물로 입증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일반적으로 명목상 ‘선물’로 쓰이기 때문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다른 선물들과 달리 시계는 건넨 측에서 어떤 청탁을 했는지 진술을 내놓지 않으면 뇌물이라는 대가성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 점을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박기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이용하고 있다. 특히 박 의원은 자녀들이 받은 시계에 대해서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는 상황. “자녀들이 건설업자에게 위블로 등 여러 개의 명품 시계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알지 못했고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알게 돼 뒤늦게 돌려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겠다며 자신의 아들들을 증인으로 채택해달라고 요청했다. 박 의원은 “시계를 받은 것은 맞지만 정치자금법상 금지되는 금품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범죄 혐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범죄은닉 혐의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박 의원 측의 주장이다. 법조계에서는 박 의원이 받은 9개의 명품 시계 전부가 유죄로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언제, 어떻게, 가족들 중 누가 받았는지, 박 의원이 알고 있었는지 등을 고려해 일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