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복수극?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성완종 사태를 흔히 ‘망자의 실패한 복수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망자가 남겨놓은 ‘박근혜 대통령 대선자금 의혹’이라는 불씨가 남아있어, 이 복수극의 결말은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4월 3일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 출석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그는 죽기 전날부터 이상했다. 법원 영장실질심사를 앞둔 피고인이 갑자기 기자회견을 하는 것부터 상식적이지 않았다.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기자회견 자체가 오히려 법원 판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 기자회견장에선 경남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를 ‘표적 수사’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MB(이명박)맨’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억울하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예순넷의 어른이 공식석상에서 말 그대로 엉엉 울었다. 그 눈물이 거짓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맥을 놓고 울음보를 터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별도 달도 채 잠에서 깨어나기 전 북한산 형제봉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몇 시간 뒤 발견된 주검, 망자의 복수극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시신을 검시하던 경찰은 망자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부산시장 2억, 김기춘 10만 불 2006. 9.26 벨기에, 이병기, 이완구’라고 적힌 메모를 발견했다.
다음날인 4월 10일 <경향신문> 1면에는 메모 내용을 뒷받침하는 그의 마지막 생전 인터뷰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김기춘, 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에게 각각 미화 10만 달러, 현금 7억 원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죽을 자리를 찾아가기 전 치밀하게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박근혜 정부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복무(돈을 전달)했는지 설명했다.
그가 예상했듯이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이들이 현 정부 실세들이거나 친박 핵심들이었던 만큼 당장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박근혜 정부 위기론이 급부상했다. 당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실이 아니다”고 떠들어댔지만, 세상은 망자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와 메모 내용을 더 신뢰하는 분위기였다.
성완종 게이트에 연루된 홍준표 경남지사.
여야 균형을 맞춘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성완종 특별사면 특혜 의혹이 제기됐던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에 대해서도 무혐의 처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 씨가 특별사면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에 대해선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노 씨는 현재 검찰 수사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새정치연합 김한길 의원의 경우 생전 망자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계속 수사’라고 밝힌 채 특별수사팀 활동을 마감했다.
여론의 지탄이 잇따랐지만 세상은 곧 그를 잊었다. 망자가 생전 자식처럼 아끼던 비서진이나 보좌진은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가 선고됐고, 성완종 리스트 실체를 밝혀내지 않았거나 덮고 가려고 했다는 의혹 당사자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산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사건을 지워갈 수 있었고, 일상을 살아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숱한 의혹에도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으로부터 단 한 번도 소환조사를 받지 않고 서면조사로 대체했고, 심지어 그는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부인을 대동하고 일본을 다녀오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정치권과 법조계 안팎에선 그의 영향력은 박근혜 정부가 끝날 때까지도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를 타깃으로 사정 수사를 기획했던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또 어떤가. 현 정부 핵심 실세로 알려져 있는 그는 김 전 실장의 지원으로 민정비서관에서 민정수석으로 승진한 후 검찰에 포스코와 경남기업 수사를 지시한 당사자다. 지난 3월 청와대발 기획 사정수사가 시작되고 성완종 전 회장 자살 후 잠시 ‘우병우 책임론’이 제기됐지만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 결과 그의 검찰 장악력은 어느 때보다 확고한, 반대편에서 보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청와대 하명수사가 비일비재하고 검찰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포스코와 경남기업 수사에서 우병우 수석과 호흡을 맞춘 최윤수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있고,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을 이끌었던 문무일 검사장도 고검장으로 승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특히 문 검사장의 경우 사법연수원 18기 동기들이 대부분 청와대의 강요에 못 이겨 옷을 벗은 상황에서 살아남는 몇 안 되는 인사다.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도 고검장 승진을 앞두고 있다. 차기 검찰총장을 위한 ‘예비군’으로 박 지검장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시나리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박 지검장은 중앙지검장 취임 후 한 달여 만에 경남기업 수사를 시작했다.
황교안 국무총리도 성완종 리스트 수사 와중에 법무부 장관에서 일국의 총리로 영전한 케이스다. 황 총리는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국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성완종처럼) 특별사면을 거듭해서 받은 사례 자체가 많지 않다. 다소 이례적인 사면에 대해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성완종 리스트로 김기춘 전 실장 등 친박 핵심 인사들에게 쏠린 시선을 문재인 대표, 이재정 전 장관, 노건평 씨 등에게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속 거론해 의혹을 부풀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심지어 4월 13일에는 국회에서 “성완종 리스트 수사 여론몰이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오히려 집요하게 성완종 특사 특혜 의혹을 물고 늘어졌다. 황 총리의 이런 태도는 그가 차기 총리로 내정된 6월 하순까지 질기게도 계속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으니 살아있는 현실 권력이 못할 게 뭐가 있겠느냐”며 “성완종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이들이 지금 어느 자리에 가 있는지를 하나하나 찾아보면 씁쓸함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완종 사태를 ‘망자의 실패한 복수극’이라고 말한다.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이 복수극의 결말은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망자가 남겨놓은 박근혜 대통령 대선자금 의혹이라는 불씨 때문이다. 특히 이 불씨는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데 그 위험성이 존재한다.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이나 서병수 부산시장이 망자로부터 받은 돈은 대선자금이라는 의혹이 성완종 사태 당시에도 나왔다. 검찰은 두 사람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 내에서 돈과 조직을 담당했던 두 사람이 이 문제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성완종 사태 당시엔 대선자금을 건드리면 박근혜 정부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정권 차원에서 수사를 막았겠지만 차기 정부에서도 그런 게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정권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아온 검찰이지만 한결같이 변하지 않았던 것은 새 정권이 들어서면 언제나 전 정권을 향해 칼을 겨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성완종 사태도 결국 5년마다 반복돼온 전 정권을 타깃으로 한 기획 사정수사의 불행한 결과물임을 반추해보면 차기 정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굳이 차기 정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법조계 내에선 홍준표 지사의 형사재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 의혹이 거론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홍 지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법조계 인사는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홍 지사가 코너에 몰리자 새누리당을 향해 공공연하게 화를 내지 않았느냐”며 “당시 홍 지사가 분노했던 것은 서청원 의원 등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 깊이 개입했던 친박 핵심들 때문이었고, 그 배경으로는 대선자금 문제가 깔려 있었다”고 전했다.
홍 지사 재판은 새해 1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동안에는 공판준비기일이었던 만큼 홍 지사가 직접 출석하지 않았지만, 1월부터는 홍 지사가 법정에 나온다. 그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법정에서 어떤 발언들을 쏟아낼지는 벌써부터 관심사가 되고 있다. 검찰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홍 지사는 당신들(새누리당 내 친박)이 나의 당대표 경선자금을 문제 삼는다면 나는 당신들의 대선자금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성완종 사태 이후 공개적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며 “홍 지사가 재판 진행과 관련해 시간끌기를 하는 것도 그런 메시지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홍 지사 측은 수차례 열린 공판준비기일에서 녹취파일의 증거능력 문제에서부터 16명에 달하는 증인 신청까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고 있다. 결국 본인의 계속된 거짓말이나 말실수로 법정에 선 이완구 전 총리와는 달리, 자신은 친이명박계로 분류되는데다 친박 핵심들과의 당내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기소됐다는 인식이 홍 지사 내부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상황이 차기 정권과 맞물리면 박근혜 대선자금 의혹은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더욱이 이 사건을 한번 훑은 검찰이 매우 상세한 관련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 서병수 시장 등에 대한 수사 가능성은 이 정부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돼 온 바 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특정 사건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끝날지는 사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그 사건과 그 사건을 맡은 이들의 운에 달린 게 아니겠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망자의 원한이 더 깊은지, 살아남은 자들의 운이 더 센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로 보인다”고 말했다. 성완종 리스트는 끝난 듯 보이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는 얘기다.
김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