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연맹전에 참가한 INI스틸. | ||
이처럼 여자축구가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으나 아직도 눈길 한 번 주는 사람이 없다. 이대로라면 아시아 최약체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오죽하면 ‘여자축구는 FIFA 전시용’이라는 한탄이 나올까. 깊은 늪에 빠진 한국 여자축구의 문제점과 대책을 짚어봤다.
가장 큰 원인은 ‘실업’에 있다. 실업팀 위기가 도미노 현상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켜 여자축구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 현재 실업팀은 INI스틸과 대교 두 팀뿐이다. 대표선수를 다수 보유했던 숭민 원더스는 지난해 11월 해체됐다. 숭민 소속의 대표급 선수 일부는 운동을 쉬고 있으며 특히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인 김미정 등이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선교팀인 헤브론도 지난해부터 대회 참가를 포기해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다. 인수 구단은 여전히 나타나질 않고 있다. 월드컵 전후로 몇몇 기업이 의사 타진을 해왔으나 구체적인 협상 단계에서 꼬리를 내렸다. 이젠 아예 ‘입질’도 없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 정부투자기관 및 출자기관들도 ‘전혀 관심없다’는 반응이다. 협회와 여자축구연맹이 문화관광부에 실업팀 창단과 관련한 건의안을 제출했지만 묵묵부답이라고 한다. 김종희 여자연맹 회장은 “여자축구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문화관광부와 정부에 협조를 요청한 상태나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밀려드는 고졸 선수들을 붙잡아야 할 ‘책임’이 있는 대학도 제자리걸음이다. 오히려 여자대학팀 최강인 경희대가 재단의 체육부 축소 방침에 따라 여자축구부를 해체 1순위로 올려놓고 있어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경희대는 최근 해체 결정에 대해 비난 여론이 일자 축구부를 운영하되 신입생은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위를 낮췄다. 협회와 여자연맹이 4년제 대학 및 사립여대(이화여대, 숙명여대 등)의 창단을 유도하고는 있으나 대학측에선 재정상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중도에 선수생활을 그만두는 경우도 늘고 있다. INI스틸이나 대교로 이적하지 못한 숭민 선수들은 축구를 그만두고 다른 삶을 찾고 있다.
숭민 해체와 함께 은퇴를 선언한 김미정은 “지금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며 “월드컵에 대한 미련도 전혀 없다. 정말 축구가 싫어졌다”고 솔직한 은퇴 심정을 밝혔다. INI스틸로 이적한 국가대표 주전 공격수인 이지은도 팀을 찾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한참 동안 동료들이 꿈에 나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가끔씩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다”고 아픈 심정을 토로했다.
실업 두 팀이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데다 대학 6개 팀마저도 ‘그들만의 리그’를 치르다 보니 선수 개인 기량 향상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표팀 경기력 저하로 곧장 이어지고 있다. 특히 여자선수로선 체력적으로 전성기인 18∼20세 유망주들이 고교 졸업 후 기량을 닦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점은 축구인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
대표팀 최고참인 INI스틸의 이명화는 “좋은 후배들이 나오고 있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며 “실업팀이 더 생기지 못할 바에야 남자대표팀처럼 해외팀을 자주 초청해 젊은 선수들이 국제경기 경험을 더 쌓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미정도 “자꾸 지더라도 외국팀들을 계속 불러들여 경험을 쌓게 해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대표 출신인 임은주 K리그 전임 심판은 2년제 대학팀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대표팀 주전을 꿰찰 만한 젊은 선수는 나오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임 심판은 “일정 성적을 내야 조금이나마 관심을 받는 여자축구의 현 실정에서 세대 교체란 명분으로 어린 선수들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라며 “중국과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긴 하나 그들과는 다르게 우리 젊은 선수들은 열악한 시스템으로 인해 선수로서 거쳐야 할 체계적인 과정을 밟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선발과정에서 구심점 노릇을 해야 할 기술위원들의 역할이 미흡하다는 비난도 거세다. 일선 감독들은 실제 기술위원들이 선수선발 권한이 있음에도 현장을 거의 찾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여자대표 선발 기술위원회는 감독이 추천한 명단을 최종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대표상비군이 활성화되지 못한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현재 18세 이하(감독 진장상곤)와 16세 이하(김종건) 상비군이 방학을 이용해 연간 48일 동안 손발을 맞추고 있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협회가 아닌 대한체육회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까닭에 살림은 빠듯할 수밖에 없다. 진장상곤 감독은 “잘 먹이지 못하는 점이 가장 아쉽다”면서 “가끔 파주 트레이닝센터를 찾을 때면 아이들의 체중이 불어날까봐 걱정스럽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여자 전문지도자 양성과정도 전무한 상태. 아직도 현장에서는 남자선수들의 훈련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협회 지도자 강사로도 재직하고 있는 진장상곤 감독은 “오직 승리에 대한 집념이 앞서 기본기와 기술을 무시한 채 체력 위주의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여자축구의 부활을 위해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젠 분위기를 바꿀 빅카드를 꺼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김종희 여자연맹 회장은 “남북한 축구 교류를 통해 여자 축구의 붐을 일으켜 볼 생각”이라며 “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에서 북한 여자축구 위원장인 한필화 교수를 만나 서울·평양 여자축구대회 창설을 공식적으로 제안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또한 김 회장은 “실업리그의 중국·일본 실업팀 참가와 대표팀의 국제경기 횟수를 늘리는 방안 등도 협회와 논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월드컵 본선 티켓 확보에 실패할 경우 모든 방안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유재영 월간축구
베스트일레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