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밖에도’ 술을 전혀 못마시는 전창진 감독은 대신 다양한 개인기로 좌중을 리드한다고. 이종현 기자 | ||
지난 4월25일 서울 강남의 한 간이술집에서 마주앉은 전창진 감독(40·프로농구 TG)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기자의 술잔이 마를 새 없이 연신 술을 따르면서 입으론 사람을 빨려들게 만드는 ‘뻐꾸기’(입담)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전 감독은 2002∼2003 프로농구 우승 후유증을 톡톡히 겪고 있었다. 연일 되풀이되는 ‘우승 뒤풀이’로 인해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며 하소연부터 한다. 그는 4월30일 공식적인 ‘축승회’를 끝으로 일본행 ‘잠수함’을 탈 계획이라며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가 술을 안한다고 해서 기자마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종을 소주 대신 맥주로 ‘수위’를 낮췄고 카메라 셔터만 눌러대던 사진기자가 일찌감치 ‘작업’을 끝내고 대신 술잔을 부딪쳐줬다.
‘그림’을 위해 맥주잔을 받아만 놓고 ‘제사’를 지내던 전 감독은 “한 모금이라도 마셔야 하는 거 아니냐”는 가벼운 항의에 “입만 대도 얼굴이 벌개져 엄두가 안 난다”며 엄살을 떤다.
“처음엔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생긴 건 술독에 빠져 지낼 것 같은 사람이 술을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니까 이해를 못했던 거죠. 특히 회사 임원들이나 기자들 사이에선 원성이 자자했어요. 물론 배워보려고 노력을 해봤죠. 그런데 술만큼은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전 감독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노하우를 개발했다. 각종 유머와 흥을 돋우는 댄스곡 등을 암기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의 상식을 섭렵하는 등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병권’을 쥐는 대신 ‘입담’을 통해 술자리를 주도해 갔다고 한다.
▲ 허재 | ||
“다른 팀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힘든 훈련을 해냈어요. 우리팀 구성 선수들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운동을 많이 안 시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다른 팀 감독들을 만나면 별로 훈련을 안 하는 것처럼 ‘연기’를 했었죠. ‘초보 감독’이 뭘 얼마나 하겠냐는 읍소 작전도 주효했고요. 대신 체육관에 돌아오면 장난 아니게 ‘뺑뺑이’를 돌렸어요. 내 성격이 겉으론 유해 보여도 좀 ‘지랄’ 같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운동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는 선수 시절의 철학이 지도자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대충 시간만 때우려는 선수들은 전 감독의 호된 질책 속에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야단을 쳐도 훈련장에선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뒤 개별 면담을 통해 문제점을 지적했다.
“코치와 트레이너가 욕을 많이 먹었어요. 훈련 스케줄은 내가 정했고 그들은 지시대로 따를 뿐인데 엄청난 훈련량으로 인해 선수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죠. 그럴 때 나까지 인상 쓰고 있으면 안돼요. 난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코치와 트레이너에게 “훈련 좀 살살 시키지 그래”하고 분위기를 바꿔줘요. 코치와 트레이너가 엄한 시아버지였다면 난 자상한 시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거죠. 그래야 선수들이 긴장과 여유를 가질 수 있어요.”
전 감독은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드러난 허재와의 관계에 대해 ‘제발 색안경을 끼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허재의 카리스마와 강한 분위기로 인해 전 감독과 허재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들이 있었던 것.
허재가 그동안 다른 감독과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전 감독은 “허재한테 지는 걸 못 견뎌했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전 감독은 시즌 중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만큼 큰 슬럼프를 겪었던 일화도 소개했다. 새해 첫날 심기일전해 맞닥뜨린 SBS전에서 처음으로 2차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패했던 게 불씨가 됐다. 그 이후 4연패를 당하며 내리막길을 향해 내달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코리아텐더와 함께 TG 돌풍을 일으키며 스포트라이트의 정점에 서 있다가 갑작스런 연패로 인해 표현 못할 시련을 겪은 것.
“초보 감독 전창진의 한계를 보여준 것 같더라고요. 향수병에 빠진 데릭 존슨이 제 몫을 해주지 못하고 있어 더 더욱 힘들었죠.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선배 감독들한테 자문을 많이 구했습니다. 정말 성심성의껏 도와주셨어요. 코트에서 만나면 적군이나 다름없지만 친동생처럼 대해주는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정말 살기가 빡빡했을 거예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 감독은 선수 시절 아픈 생채기가 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실업 첫해에 발목 수술을 받은 뒤 재기에 실패하는 바람에 은퇴를 했던 것. 그후 삼성농구단 주무를 맡아 10년 넘게 농구단 살림을 ‘주무르다가’ 98∼99시즌 삼성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TG에서 코치와 감독대행을 거쳐 올해 대행이란 꼬리표를 떼고 정식 감독이 된 첫해, 우승이란 대위업을 달성한 것.
“제이 험프리스 코치가 우승 후 미국으로 가기 전 한 말이 기억나요. ‘전 감독, 당신은 지금부터 챔피언 감독이 아니다. (다음 시즌) 챔피언 감독이 되기 위해 이 시간부터 노력해야 한다’는 명언이었어요. 으레 하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부담이 더 커졌어요. 우승을 해도 배고픈 건 여전히 마찬가지라는 말이 정말 틀리지가 않더라고요.”
이사하는 날, ‘취중토크’를 하고 있다는 전 감독은 미안해하는 기자에게 “아내가 혼자 이사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안심을 시켰다. 정말 신기한 건 맥주 4병이 비워지는 동안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술 마신 사람보다 더 얼굴이 벌개지고 흥분돼 있는 전 감독의 모습이었다.
드라마틱한 우승의 주인공이었지만 의리와 정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는 천생 남자다운 남자였다. 전창진 감독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