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일제시대 당시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의 시 ‘광야’의 마지막 구절이다. 72년 전 오늘인 1944년 1월 16일, 시인 이육사가 옥사했다. 그토록 바라던 초인은 보지 못했다.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운명을 달리했던 비운의 시인 이육사.
이육사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어린 시절 한학을 수학하다 도산공립학교에 진학하며 신학문의 세계로 입문했다. 1925년 의열단에 가입한 이육사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투옥 생활을 시작한다. 본래 ‘이활’ 이란 본명을 갖고 있었던 그가 필명 ‘이육사’로 갈음한 것은 바로 이때 수감번호가 264였기 때문이다. 1932년 이육사는 중국의 대표적 반정부 논객이었던 루쉰과 직접 만나 당시 동북아 정세를 논하기도 했다.
당시 이육사는 일제에 있어선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는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귀국했다가 일제에 체포됐다. 곧바로 조국과 떨어진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이듬해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구금 중 운명을 달리했다. 그의 동생은 유해를 수습하러 먼길을 떠났고, 유해는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육사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유해는 광복 후 1960년 고향인 안동으로 이장됐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