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렵게 마련한 취중토크에서 서재응은 솔직함과 재치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됐지만 자신의 위치와 평가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이종현 기자 jhlee@liyo.co.kr | ||
‘취중토크’에 메이저리거 서재응을 초대하기까지 여러 가지 난관들이 있었지만 막상 ‘무대’에 오른 서재응은 말 그대로 프로다웠다. 술잔을 앞에 두고 종전의 피곤한 기색을 어느새 벗어던진 채 예상을 뛰어넘는 입담과 재치로 취재진을 ‘기절’ 직전까지 몰고 갔다. 보고 또 봐도 잘생겼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훤칠한 외모에다 메이저리거답지(?) 않은 친절하고 솔직한 매너…. 그의 호탕하고 시원한 성격 이면에 감춰진 외로움과 소심함(?)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은 서재응과의 ‘광주 데이트’를 소개한다.
서재응은 미국에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개인 기록은 소주 7병이 ‘맥시멈’인데 당시엔 ‘술발’이 잘 받아서 그 정도 마셔도 약간 알딸딸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소주 1병 반에서 2병이면 ‘한계수치’에 다다른다. 미국에선 가급적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피하는 편이라고 한다. 술이 싫어서가 아니다. 분위기에 적응되지 않아서다.
싱글A 시절 단 한 차례, 술내기를 제의한 동료들과 ‘맞장’을 뜬 적이 있었다. 도통 술자리에 끼지 않는 서재응한테 ‘술도 못 마신다’며 시비를 걸었던 게 발단이었다. 오기가 난 서재응은 ‘오늘 너희들 한번 죽어봐라’ 하는 심정으로 캔맥주 48개를 들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5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접고 메이저리그에 올라갔을 때 서재응은 한동안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특히 필라델피아와의 첫승 이후 기쁨보다는 앞으로 자신의 갈 길이 어떤 색깔로 나타날지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와 닿았다고 한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와보니 두 번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가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메이저리그에서 탈락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신 잡기가 힘들 것 같았어요. 마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처음 메이저리그로 승격한 뒤 팀 동료들하고 걸어갈 때는 무조건 땅만 보고 걸었단다. 원정 경기를 위해 비행기에 올라타면서도 어디에 앉아야 할지를 몰라 이 선수, 저 선수에게 귀동냥을 하기도 했다(나중에 알고 보니 선수들마다 모두 지정석이 있었다고 한다). 베테랑들이 많은 상황에서 괜히 튀는 행동을 해 눈 밖에 나기보다는 차분히 지켜보면서 분위기 파악을 먼저 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이러한 서재응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그가 연승 행진을 벌일 때는 터부시했던 선수들이 서재응한테 다가와 등을 두드리며 ‘수고했다’ ‘정말 잘 던졌다’는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네 왔다. 다 잡았던 경기를 타력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중간계투의 실수로 아깝게 놓쳤을 때는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플 정도였지만 동료 선수들의 애교있는 ‘오버액션’으로 꼬인 마음을 풀기도 했다.
“웨덜스라는 중간계투 선수가 있거든요. 하루는 그 친구가 씩씩거리며 라커룸으로 들어와선 이렇게 소리치는 거예요. ‘야, 서재응 정도면 지금 8승이나 9승은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그 중에서 내가 두 경기를 까먹었다. 진짜 미안하네. ××.’ 정말 웃기기도 하고 고마웠어요. 동료들과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조금씩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죠.”
그 이후 서재응은 동료들로부터 언젠가는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별 볼일 없는 선수’가 아니라 ‘뉴욕 메츠에 정말 필요한 투수’로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 국민일보 | ||
서재응은 메이저리그에 첫 발을 내딛으며 가장 기억나는 순간으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외야수 게리 셰필드와의 첫 대결을 꼽는다. TV나 신문에서만 봤던 게리 셰필드를 상대로 공을 던져야 하는 운명적인 상황에서 셰필드가 타석에 들어서자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는 것.
“어떤 공을 던져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아무리 머릴 굴려 죽을 둥 살 둥 던져도 그 친구는 공을 다 쳐낼 것만 같은 힘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발 서서 그냥 죽어라. 아니면 네가 쳐서 죽어줘라’ 하는 심정으로 공을 던진 기억이 나요.”
올스타전을 앞두고 서재응은 잠시 자만에 빠지기도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올스타 명단 발표를 앞두고 은근히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기를 기다렸던 것. 올스타전 이전에 치르는 두 게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이를 ‘의식해’ 게임을 치르다가 몬트리올전에서 ‘묵사발’이 된 가슴 시린 추억도 있다.
“내년엔 조금씩 언론이 무서워질 것 같아요. 성적이 좋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언론에서 절 가만 놔두지 않을 거잖아요. 귀국해서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에 응한 부분들도 도마 위에 오르겠죠. 조금 떴다고 여기저기 얼굴 내밀다가 시즌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등 갖가지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겠죠. 정말로 그런 소리 들을까봐 벌써부터 겁나요.”
서재응은 아직도 자신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루키’라는 타이틀을 달고 메이저리그 첫 시즌을 보낸 지금 자신의 위치와 평가가 제대로 됐는지조차 헷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목표를 말할 때 ‘몇 승을 올리겠다’고 꼬집어서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야구선수 서재응이 적극적인 ‘싸움닭’ 기질을 갖고 있다면 자연인 서재응은 호탕하면서도 외로움을 타고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을 즐긴다는 ‘자체 평가’를 내리는 그한테 예비 신부이자 약혼녀인 이주현씨에 대해 물었다.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을 준 여자예요. 독특하다 못해 괴팍하기도 한 운동선수의 성격을 너무 잘 이해해 주었거든요. 이번에 주현이 들어오면(12월12일 귀국 예정) 아마도 양가 부모님들끼리 상의해서 결혼 날짜를 잡을 것 같아요.”
사이영상이 메이저리그에서의 최종 목표라는 서재응은 그 ‘정상’을 향해 달리거나 걷기를 반복하면서도 결코 서두를 생각이 없다고 한다. 마운드에서만큼 인생의 ‘제구력’에도 한층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