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씨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스스로 보육원 출신이라고 스스럼 없이 말한다. 아버지가 의사여서 홍씨가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꽤 잘 살았다고 하는데, 5·16 후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다는 것을,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들어 기억하고 있을 뿐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조차 없다.
어렵게 컸다.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했을 때, 아들을 낳으면 무엇을 시킬 것인가 생각을 했다. 아무런 연고 없이, 일체의 연고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와 노력만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명예도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얻은 결론은 프로기사였다. 예체능의 길도 있었지만, 그쪽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그러나 바둑은 독학할 수가 있다. 코치도 필요 없다. 장비도 필요 없다. 돈이 들지 않는 길이었다.
혼탁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맑게 해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아들과 딸의 이름도 맑은샘, 맑은비 라고 지었다.
프로기사가 되는 데에는, 굳이 학교 교육 같은 것도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의 것, 기본은 가르쳐야 한다는 아내의 주장에 따라 맑은샘을 초등학교에는 보냈다. 그리고 초등학교가 끝이었다.
맑은비도 학교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주입식 교육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맑은비도 초등학교가 끝이었다. 맑은비는 요즘 애니메이션 공부를 하고 있다. 두 아이 모두 아빠를 고마워하고 있다. 또래의 친구들을 보면 학교 공부에 치어 늘 짜증스러운 얼굴인데 그런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맑은샘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절반은 나가지 않았다. 선생님도 이해를 해주었다. 1991년, 맑은샘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입단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아깝게 놓치고 말았다. 그때 일년 정도만 맑은샘을 프로기사에게 보내 바짝 공부를 시켰다면, 맑은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입단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했다. 그게 지금까지 아들 맑은샘과 바둑여행을 하는 동안에 남아 있는 하나의 아쉬움이다.
이후 프로기사를 향한 몇 번의 시도가 실패하자, 몇 년 전에 맑은샘은 “프로기사에의 꿈을 접고 아마추어로 남겠다”고 선언을 해 버렸다.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10대 중반까지 입단하지 못하면 큰 비전은 없는 것,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마추어로도 할 일은 많으며 생활할 수도 있는 것. 게다가 존경도 받을 수 있는 것. 일본 바둑계의 4천왕은 그 좋은 예이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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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기사 ( 2024.12.31 1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