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은 게이였다” 불씨 지피고 떠나
[일요신문] 데이비드 베이컨의 죽음에 대한 경찰 수사는, 많은 단서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 구슬을 꿰는 게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목격자도 있었고 사진도 분명했고, 용의자도 나타났다. 하지만 확실한 그 무엇은 없었고, 결국 경찰은 그 누구도 법정에 세우지 못했다. 사정이 이럴진대, 당연히 음모론이 피어났다. 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고, 베이컨의 성 정체성과 관련된 치정 살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으며, 당대 영화계의 거물이자 베이컨과 3년 계약을 맺었던 하워드 휴즈 배후설도 떠올랐다. 그리고 미망인인 그레타 켈러는 후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1943년 9월 12일에 과연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내 그레타 켈러
9월12일 일요일 오후에 데이비드 베이컨은 누구를 만나러 산타모니카 해변에 간 것일까? 누가 해변에서 그의 누드 사진을 찍어 주었으며, 과연 어떤 자가 어떤 이유로 15센티미터에 달하는 긴 칼날을 베이컨의 등 뒤에서 찌른 것일까? 왜 그는 죽기 이틀 전에 한적한 곳에 있는 집을 빌렸으며, 그때 베이컨과 동행한 남자는 누구일까? 이때 이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줄지도 모르는 단서가 나왔다. 베이컨의 비밀 일기였다. 아내인 그레타 켈러가 집에서 찾아낸 일기는 경찰에게 건네졌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베이컨은 자신만 알고 있는 암호를 사용해 기록을 했던 것. 그래도 수확이 있었다면 누군가의 전화번호였다. 경찰은 전화번호의 주인인 글렌 숌이라는 남자를 긴급 체포했다. 그는 선원이었고, 베이컨이 자신에게 정원 손질 일을 의뢰했는데 죽기 며칠 전에 취소했다고 말했다. 이렇다 할 혐의는 없었고, 그는 풀려났다.
이외에도 많은 미스터리들이 있었다. 먼저 그가 입은 상처가 의문투성이였다. 그가 등에 입은 상처의 깊이는 15센티미터에 달했다. 손잡이까지 합한다면 칼의 전체 길이는 30센티미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꽤 긴 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의 자동차의 핏자국은 차 내부에만 있었다. 만약에 차 밖에서 칼에 찔려 피를 흘렸다면, 차 외부에도 어느 정도 피가 묻어 있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 즉 베이컨은 자동차 안에서 칼에 찔렸다는 이야기인데, 그의 차는 지붕이 열리는 스포츠카가 아니라 세단이었다. 내부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았고, 그 안에서 30센티미터나 되는 칼로 힘 있게 찔러 15센티미터의 상처를 만든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시관들은 베이컨이 경고 없이 뒤에서 찌른 칼에 당했다고 결론 내렸는데,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등 뒤에서 찔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칼이 운전석을 관통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찔린 상태에서 운전을 했다는 것인데, 주유소나 사고 현장의 목격자들이 전한 증언을 종합해보면, 그는 30분 정도는 그 상태에서 운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선 잘해야 20분 정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다.
증언들도 심상치 않다. 서너 명의 목격자들이 죽기 전의 베이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모두 차에 베이컨 이외의 누군가가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워터슨 부인은 자동차에 승객이 한 명 더 있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연히 사고 전에 자동차 옆을 지났는데, 상체에 아무 옷도 입지 않은 남자가 운전을 했고(당시 베이컨은 수영복 트렁크 차림이었다.) 그 옆에 짙은 색의 수트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로레인 스미스라는 여성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차에 탄 걸 보았다고 했다. 도널드 로버츠라는 목격자는 사고 30분 전 주유소에서 베이컨의 차를 보았는데, 그도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이야기했으며, 남자는 키가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만약 그가 범인과 동승하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을 찌른 사람을 태우고 20~30분 정도를 운전한 셈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 들어갔다.
작은 사진 둘 다 맨 왼쪽이 베이컨. 베이컨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두고 성 정체성과 관련된 치정 살인 등 여러 음모론이 있었지만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난 지 8일째 되던 9월 20일, 블레이클리 패터슨이라는 남자가 증인이라며 경찰 앞에 나선 것이다. 밴드 가수이며 무명 배우였던 그는 베이컨을 안 지 두 달 정도 되었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수영을 하다 만났다고 했다. 가벼운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조금씩 친해졌고 식사도 몇 번 함께 했으며, 베이컨이 죽은 날도 만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베이컨이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협박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패터슨에게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난항을 겪던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증언을 한 다음 날, 패터슨은 갑자기 자신의 말을 취소했다.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과의 일을 착각했다는 것이다. 경찰이 계속 추궁하자, 패터슨은 결국 속내를 털어놓았다. 베이컨에 대한 증언으로 신문에 얼굴이 나면 배우 캐스팅에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지어낸 이야기였던 것. 그는 열흘 동안 구치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9월 말에 찰스 와일이라는 23세의 남자가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수했다. 하지만 그는 사건의 정황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그도 풀려났다.
영화 <마스크 마블> 한 장면.
결국 범인은 잡히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 듯했다. 그런데 미망인 그레타 켈러는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자신은 레즈비언이었고 베이컨은 게이였다는 것. 그들은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한 위장 결혼, 즉 ‘라벤더 매리지’를 했고 실제로 베이컨이 죽은 후 켈러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잠시 재조명되었다. 특히 그와 계약을 했던 하워드 휴즈와 동성 연인이라는 설이 돌았고, 베이컨이 그 사실을 터트리려 하자 휴즈가 암살했다는 루머도 만들어졌다. 그가 1939년에 소년 성추행으로 LA에서 3년간 추방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지면서, 혹시 이런 문제와 관련된 살인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켈러는 불씨만 지펴 놓은 채 1977년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