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거 당시 신창원
1967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신창원은 어린 시절 불우한 삶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윈 그는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 두고, 1982년 절도죄로 처음 소년원에 수감된다. 당시 그의 부친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버릇을 고친다고 경찰에 구속 수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신창원과 아버지사이의 갈등은 극을 치달았고, 그가 삐뚫게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서울로 상경한 신창원은 배달부 생활의 여의치 않자, 1983년 또 다시 절도죄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1989년엔 공범 세 명과 서울 돈암동의 한 가정집에 침입해 강도짓을 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살인을 저지르는 바람에 신창원은 무기징역이란 중형을 선고 받게 된다. 젊은 나이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기나긴 수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994년 원래 복역중이던 청송교도소에서 그는 부산교도소로 이감된다. 3년 뒤 화장실에서 탈주한 신창원은 당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약 2년간 경찰과의 도주극을 벌이며 챙긴 도주자금만 9억 8000만원에 달했다. 중간중간 유흥업소 여성들을 유혹해 자신의 아지트를 만드는 치밀함도 보였다. 무엇보다 그는 똑똑했고, 게다가 미남이었다.
경찰 입장에선 신창원이 끔찍한 존재였다. 무려 13번을 눈 앞에서 놓쳤다. 한 번은 경찰이 쏜 총에 맞고도 기적적으로 장소를 빠져나가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경찰관들이 책임을 지고 옷을 벗기도 했다.
하지만 끝은 있었다. .1999년 7월 16일 신창원이 붙잡혔다. 그가 은거중이던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한 가스관 수리공이 그를 목격한 것. 신창원은 그렇게 이 수리공의 우연한 목격으로 허무하게 도주생활을 마무리한다. 당시 그를 체포한 수사과장 김진희는 훗날 광주동부경찰서장으로 부임했고, 당시 수리공은 경찰 특채됐다.
한편 신창원은 22년 6개월 형을 추가로 받고 경북북부 제1교도소에서 수감중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