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코치 모시려다 엄마들 사이 왕따도”
몸을 사리지 않은 채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피겨 꿈나무들. 피겨는 다른 종목들에 비해 경제적인 부담이 크고 부상 위험에도 항시 노출돼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왼쪽 사진은 피겨종합선수권대회에서 만 11세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유영. ‘포스트 김연아’로 주목받고 있다. 연합뉴스
‘포스트 김연아’로 주목을 받은 유영이 더 큰 화제를 모았던 건 올해부터 바뀐 빙상연맹의 규정에 의해 태극마크를 반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2003년 7월 1일 이전에 태어난 선수만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유영은 최연소 챔피언이 되었지만 태극마크를 달 수 없었고, 이로 인해 태릉실내빙상장 사용을 할 수 없다는 부분 때문에 피겨계의 공분을 샀던 것이다.
유영의 장래를 응원하는 피겨 팬들은 여론몰이를 하며 빙상연맹이 유영을 지원해주길 바랐다. 급기야 연맹은 지난 17일 상임이사회를 열고, 유영 등 피겨 유망주의 훈련을 지원하는 육성 방안을 마련했다. 이로 인해 유영은 국가대표팀 대관 시간에 태릉실내빙상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자신이 희망할 경우 ‘평창 올림픽팀’ 훈련 시간에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 아울러 유영은 김연아가 속해 있는 ‘올댓스포츠’와 매지니먼트 계약도 맺었다.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고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던 유영으로선 김연아와 한 식구가 되는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대회 우승으로 빙상연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유영은 굉장히 특별한 케이스이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해서 모두 유영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게 피겨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기자는 A 아이스링크장을 찾았다. 수많은 피겨 꿈나무들이 몸을 사리지 않은 채 연습에 몰두했다. 아이들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한 어머니에게 다가가서 유영 얘기를 꺼내자, 그는 “그래도 유영은 행복한 선수죠”라며 자조적인 목소리를 들려줬다. 초등학교 2학년 딸이 피겨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유영의 실력이 참가 선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유영 같은 혜택을 받기는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유영은 노력도 많이 했지만 타고난 실력이 월등한 선수이다. 다른 링크장에서 유영이 훈련하는 걸 지켜보면서 우리 아이가 갖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절감했다. 그런 선수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 인정받고, 연맹의 지원을 받는 건 정말 축하할 일이지만 나로선 누구나 유영과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또 다른 어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인 딸이 피겨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피겨는 승급 레벨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유영처럼 고난이도의 기술을 선보이는 선수는 8급이고, 대부분 초급에서부터 시작해서 급수를 늘려간다고 한다. 그의 딸은 4급 선수였다. 처음 딸이 피겨를 접하게 된 계기는 취미 생활이었단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스케이트를 신기 시작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정식으로 피겨를 배웠다. 피겨는 돈도 많이 들고, 부상 위험도 있어서 처음엔 반대했지만 아이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강습에 보내기 시작하다 결국 선수 생활에 접어들었다. 아이가 피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랑 남편은 맞벌이 부부였다. 난 전문 통역원으로 활동을 했는데 아이가 피겨를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둬야 했다.”
피겨 유망주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부모들. 연합뉴스
“아이한테 한 달에 들어가는 돈이 평균 500만 원 정도 된다. 이 액수는 가장 적게 잡은 비용이다. 링크장 대관비, 레슨비, 체조, 발레, 안무비, 웨이트레이닝비, 재활치료비 등을 모두 합한 금액이다. 사실 웬만한 집안에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비용이다. 아이가 해외 전지훈련이라도 가게 되면 1000만 원을 웃도는 돈이 지출된다. 딸을 위해서 집을 담보로 대출받는 건 기본이고, 시간이 갈수록 아파트 평수가 줄어든다고 하소연하는 부모들도 한두 명이 아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부상은 선수들 사이에서 흔한 ‘일상’이다. 높이 점프를 하느라 몸을 제어하지 못하면 딱딱한 빙판 위에 크게 넘어지기 마련이다. 안전장치가 전혀 없는 빙판에 몸을 맡긴 채 점프를 시도하는 어린 선수들을 보면 안타까움이 배가 된다. 어머니의 얘기는 계속 이어진다.
“우리 딸도 점프하다가 엉덩이 꼬리뼈를 다치는 바람에 6개월을 쉰 적이 있었다. 한두 달만 건너뛰어도 실력이 뒤처지기 마련인데 6개월을 쉬었으니 그걸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래도 그걸 해내더라.”
링크장에서 만난 박 아무개 코치는 기자에게 자신이 밀고 있는 유망주라며 한 선수를 소개시켜줬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해서 6학년에 오른 최 아무개 양이었다. 그는 현재 피겨의 트리플 5종과 더블악셀 점프를 가뿐하게 뛰는 선수로 성장했다. 지금은 점프를 뛰는 데 두려움이 없지만 더블악셀 점프를 익히는 데 2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고 말한다. 더블악셀은 선수로 입문하는 첫 단계의 점프이다. 2년 동안 2바퀴 반의 점프를 성공한 그는 급속도로 점프를 습득했고, 마침내 급수 중 제일 높은 8급에 합격했다.
“프리스케이팅에서 더블악셀 점프에 트리플토룹과 더블루프까지 3연속 컴비네이션 점프를 뛰는 게 목표인데 이게 너무 어렵다. 점프 연습하다가 부상을 많이 당해서 온몸이 종합병동이나 마찬가지다. 피겨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단계가 올라갈수록 힘든 부분이 너무 많다. 또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대회에서 온전히 실력으로만 인정받기가 어려워 많이 속상하다.”
최 양이 ‘온전히 실력으로만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말의 의미가 궁금했다. 그에 대해 앞서 인터뷰에 응한 어머니가 설명에 나섰다.
“똑같은 실력을 갖고 있는 아이라고 해도 심판이 점수를 매기는 상황에서 같은 점수가 나올 수 없다. 우리 딸도 기술점수에선 1등을 했는데 예술부문에선 점수를 얻지 못해 상을 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예술 점수의 기준은 심사위원 마음이다. 그래서 종종 점수 때문에 학부모들과 대회 관계자들과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그 어머니는 피겨 선수를 둔 어머니들 사이에서도 종종 갈등이 벌어진다고 토로했다. 유명한 코치를 선점하려다 다른 어머니로부터 제재를 받았고, 그게 알려지면서 어머니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다는 것. 그는 그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닌 적이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한편 A 링크장의 박 아무개 코치는 ‘제2의’ ‘제3의’ 김연아를 꿈꾸는 피겨 유망주들의 현실은 밖에서 보기보단 굉장히 치열하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을 가르쳐보면 그 아이가 피겨로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가늠이 된다. 어떤 훈련도 힘들어하지 않고 즐겁고 신나게 하는 아이들이 있고, 점프와 스핀을 도는 것도 주저함이 없는 애들이 있다. 그런 애들은 분명 괜찮은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레슨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는 없다. 가끔은 아이의 실력은 생각하지 않고, ‘내 딸을 훌륭한 피겨스케이트 선수로 만들어 주세요’하며 매달리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크다. 피겨는 다른 종목과 달리 경제적인 부담도 크고, 부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처음 피겨를 시키려는 부모가 있다면 이런 부분을 꼼꼼히 체크해봐야 한다.”
바깥의 날씨는 영하 12℃를 오르내리는 한파로 정신없었지만, 아이스링크장의 열기는 추위를 잊게 만들 정도로 후끈 거렸다. 모두 또 다른 ‘김연아’를 꿈꾸며 훈련에 열심인 유망주들의 모습 속에서, 또 그들을 지켜보는 부모의 얼굴에서, 한국 피겨 스케이트의 현실이 오버랩되었다.
기자와 친분이 있는 한 방송 기자의 딸이 피겨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 중이다. 그 기자가 자신의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더블(악셀) 이상을 뛰려면 날을 바꿔야 한단다. 스케이트 날만 57만 원이 든다. 내 허리가 자꾸 휘어지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