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에서 밀리는 자 ‘뒷물결’에 밀려난다
미래권력의 선발주자와 후발주자의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승부처는 민족 최대 명절인 설 연휴다. 설 민심과 선거 민심을 등치하는 한국 정치의 고유한 특성에 비춰보면, 이번 설 연휴 기간은 미래권력 세력재편의 중대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 4년차 설 연휴의 끝자락은 각 당의 공천 작업과 맞물린다. 설 연휴와 공천이 완료되는 시점을 전후로 민심이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총선 승리자는 대권 열차를 예약한다. 밀리는 쪽은 자신의 ‘대체재’와 트레이드된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대체재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안은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지난 2일 창당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비슷한 세대인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대안론에 허를 찔릴 수도 있다. 이 판의 주제는 ‘용들의 전쟁’, 부제는 ‘선발주자의 굳히기냐, 후발주자의 뒤집기냐’다.
왼쪽 위에서부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의원,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 반기문 UN 사무총장,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용들의 전쟁 백미는 ‘김무성 vs 반기문’ 구도다. 앞선 쪽은 현실정치에 발을 깊숙이 담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2014년 상하이 발 개헌론 등 정치적 변곡점마다 비박(비박근혜)계 지도부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 정치의 상수인 박근혜 대통령과의 부조화는 극에 달했다. 박심(박 대통령의 의중)도 끌어내지 못하면서 현재까진 보수층의 지지를 온전히 안는 데 실패했다.
실제 지난 1월 15일 공표된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의 1월 둘째 주 정례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 따르면 김 대표의 차기 대권 지지도는 박 대통령(43%)과 새누리당(40%)의 3분의 1 수준인 12%에 그쳤다. 특히 여권 텃밭인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 새누리당 지지층의 세부 조사결과를 보면, ‘김무성 위기론’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두 지역과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박 대통령은 61%·47%·81%의 지지도를 보였다. 새누리당도 60%·48%·75%를 기록했다. 반면 김 대표는 25%·13%·28%에 그쳤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지도는 비슷한 곡선을 그렸지만, 김 대표는 3분의 1선으로 떨어졌다(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여권 한 관계자는 “김 대표의 아킬레스건은 집토끼를 잡지 못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차기 대권주자의 최우선 조건인 특정 지역의 배타적 지지기반이 없다는 얘기다. TK의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필두로 PK의 김영삼(YS), 호남의 김대중(DJ)·노무현, TK의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은 확고한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지역적 정서를 ‘정치적 정서’로 환치시켰다.
여권 실세인 윤상현 의원을 필두로 친박(친박근혜)계 내부에선 “지금 대권주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 이유도 이런 까닭과 무관치 않다. 친박계 중진인 정우택 의원은 이미 선거컨설팅회사와 손잡고 본격적인 대권준비에 나섰다. 친박계 좌장격인 최경환 의원은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고리로 한 ‘실권 장악’ 국무총리 영순위다.
최 의원은 지난 1일 부산 기장에 출마하는 윤상직 전 산업통상부 장관의 예비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시작으로, ‘축사 정치’를 펼치고 있다. 그는 연일 TK 현역 의원들을 향해 “지난 4년간 뭐했느냐”며 ‘영남 물갈이’에 시동을 걸었다. 친박계 3선의 홍문종 의원도 친박계의 장기집권 프로젝트로 알려진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에 발을 담갔다. 친박계가 김 대표를 전방위로 옥죄고 있는 셈이다.
특히 20대 총선이 지닌 정치적 의미도 ‘김무성 위기론’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중도·무당파를 겨냥한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 출현으로 이번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탈이념화 현상이 강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 무산으로 연일 국회 심판론에 불을 붙이고 있다. 안 대표는 기성 정치권 심판을 고리로 한 ‘구태정치 vs 새정치’ 프레임을 내걸었다. 김 대표도 기성 정치권 심판론에서 자유롭지 않다.
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30% 초반으로 떨어지면서 레임덕 국면에 접어든다면, 김 대표의 지지도는 더욱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경우 총선은 정당 투표가 아닌 후보자 중심의 선거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총선 캐스팅보트인 수도권과 충청권에선 그 흐름이 더욱 가속된다. 김 대표가 “총선에서 180석을 확보해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할 것”이라고 천명한 상황에서 그 이하 달성 시 사실상 절반의 승리에 그칠 수도 있다. 새누리당 수도권 의원실 관계자는 “수도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지금 총선 전략이 전무한 상황에서 목표치를 너무 높게 잡은 게 아니냐”고 힐난했다.
야권 분열로 인한 일여다야 구도에서 ‘김무성호’가 압승에 실패할 경우 ‘반기문 대안론’이 대체재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 후보로 인식되는 반 총장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20대와 5060세대에서 압도적인 지지도를 보였다. 지역적으로도 여권 텃밭인 TK는 물론, 야권 텃밭인 호남에서도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반기문 현상이 기존의 ‘박근혜 대세론’과 ‘안철수 현상’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게다가 충청과 영남의 강한 지역적 연대까지 꾀할 수 있다.
반 총장의 임기는 오는 12월 말까지다. 19대 대선국면이 본격화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러브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김무성이냐, 반기문이냐’가 여권 미래권력 구도의 1차 분수령인 셈이다.
문재인 의원과 박 시장의 관계는 야권 권력구도의 핵이다. 문 의원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전권을 넘기고 ‘질서 있는 퇴각’을 선택했다. 사실상 백의종군을 선언한 그는 ‘비례대표’와 ‘총선 불출마’ 중 하나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가 어떤 길을 택하든 더민주의 간판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공언한 ‘127석’을 얻으면, 패자부활전을 통한 대권의 길이 열린다. 반대로 100석 이하에 그친다면,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문 의원도 대표직 퇴임 직전 “총선 패배 땐 자연스럽게 정계은퇴를 한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문 의원의 과제는 만만치 않다. 호남의 약한 고리(지역)를 비롯해 5060세대 포용(세대), 중도에 열린 합리적 진보(이념), ‘비욘드 노무현(인물)’ 등의 산을 넘어야만 대권고지에 오를 수 있다. 더민주 범주류 관계자는 “당 내부에는 문 의원의 행보를 놓고 1987년 체제 이후 가장 대권에 근접했다가 실패한 이회창 전 총재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의원의 정계은퇴가 현실화된다면, 범친노계에 전폭적 지지를 받는 ‘박원순 대안론’이 급부상할 전망이다. 대권 급행열차인 서울시장을 연임한 데다, 한국 사회의 새판 짜기가 가능한 경륜과 역량 갖췄다는 평가다.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 관계자는 “지난 대선 당시 친노계와 486그룹 내부에선 ‘차기 문재인’, ‘차차기 박원순’으로 정리하는 분위기였다”며 “박원순의 강점은 ‘노무현의 그늘’이 없다는 점”이라고 귀띔했다.
박원순 사단인 임종석 전 의원(서울 은평을)과 권오중 전 박원순 시장 비서실장(서울 서대문을)을 비롯해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등도 깃발을 들고 총선 출마를 선언, ‘박원순 원내세력화’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50대 선두주자인 안철수 대표와 안희정 지사의 관계도 흥미롭다. 세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공통점은 없다. 지역(부산 vs 충청)도, 이념(중도 vs 개혁)도, 삶의 궤적(의사·교수 vs 민주화운동)도 다르다. 안 지사는 안 대표가 더민주 시절 혁신 전당대회를 주장하자, “전대 의결을 뒤집는 시도는 쿠데타”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2030세대에 대한 소구력이다. 안 대표가 이 계층에 대한 현재 구심점이라면, 안 지사는 미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민주 관계자는 “안 대표 탈당으로 당은 다르지만, 이들 앞에 있는 과제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국민의당에 합류한 더민주 탈당파는 대다수가 김한길계에 가깝다. 적어도 비안철수 노선이다. 계파 측면에선 안 대표는 소수다. 안 지사도 마찬가지다. 더민주 내 안희정계는 박수현 의원 정도다. 둘 다 당내 조직혁신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 호남과 부산에서 확실한 구심점 역할을 못하는 안 대표와 충청 대망론을 반 총장에게 선점당한 안 지사 모두 ‘지역적 기반’ 구축이란 과제도 안고 있다는 얘기다.
이번 총선에서 ‘안철수 현상’의 거품이 완전히 빠진다면, 중도·무당층은 탈이념적 행보를 하는 안 지사에게 쏠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용들의 전쟁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