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대표팀 수비수 최진철은 ‘은퇴 상의’가 ‘은퇴 선언’으로 바뀐 이상한 과정들 속에서 마음의 상처을 입었다. | ||
축구대표팀의 수비수인 최진철(33·전북)이 국가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해서 전화를 걸어 확인했더니 최진철의 입에선 뭔가 심사가 뒤틀린 부정적인 답변이 튀어 나왔다. 말의 앞뒤를 잘라 보면 은퇴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었다는 내용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퇴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예상치 않은 멘트에 최진철을 직접 만나 그 속사정을 듣기로 하고 지난 6일 전주로 향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최진철은 적잖이 마음 고생을 한 듯 얼굴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아시안컵대회에서 쿠웨이트와의 예선전이 끝난 뒤 허정무 대표팀 코치에게 자신의 거취를 의논하기 위해 흘린 ‘은퇴’가 은퇴 선언으로 이어지는 이상한 과정들 속에서 최진철은 상처를 입고 황망함을 느끼며 뒤늦게 진짜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가 은퇴 얘기를 꺼낸 건 이란전이 아닌 쿠웨이트와의 예선전이 끝난 뒤였어요. 허정무 코치를 찾아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오랫동안 쉼 없이 경기를 치르다보니 지쳤다고 말씀 드리며 은퇴 문제를 상의 드렸던 겁니다. 그런데 아시안컵을 마치고 귀국해 보니 제가 은퇴를 선언했다고 보도가 된 거예요. 좀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소속팀과는 일절 상의도 하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최진철은 귀국하자마자 구단 관계자와 조윤환 전북팀 감독을 찾아다니며 은퇴 얘기가 나오게 된 상황을 설명하러 다니는 등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은퇴를 하더라도 소속팀과 상의 하에 그 시기를 결정하고 축구협회에 공문을 보내는 등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싶었는데 앞선 보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은퇴를 인정해야 하는 이상한 모양새를 띤 것.
최진철이 은퇴를 결정하지 않았다는 건 이란전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김태영(34·전남)과 나눈 대화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신문들 대부분이 대표팀 수비수의 세대 교체를 지적한 부분을 읽고 마음이 상한 최진철은 옆에 앉은 김태영에게 “형, 나 정말 은퇴해야겠네. 내가 은퇴하면 세대교체라는 말은 안 나올 거 아냐”라고 말했고 김태영은 “월드컵 1차 예선만 끝마치고 올 12월에 나랑 같이 은퇴하자”며 최진철을 다독였던 것.
그런 가운데 터진 은퇴 선언은 최진철을 또 한번 좌절의 나락으로 빠트렸다.
“제가 은퇴하기를 기다렸던 분들이 많았나 봐요. 선수한테 확인도 하지 않고 은퇴를 시켜버렸으니까요. 한편으론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년부터 은퇴시기를 놓고 줄곧 고민해 오면서도 A매치 50경기 출전 기록을 채우고 싶어 미뤄왔거든요. 결국 45경기에서 멈춰버렸네요.”
▲ 지난 7월10일 바레인과의 친선경기에서 헤딩슛을 날리고 있는 최진철. 이종현 기자 | ||
언론에 의해 은퇴가 발표된 이후 최진철은 초등학생 팬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내용은 ‘체력적인 부담으로 은퇴한다고 하셨는데 그건 핑계’라면서 ‘만약 정말 그렇다면 내가 좋아했던 최진철이 아니다’는 항의성 메일이었다. 복잡한 상황과 심정이었던 최진철은 그 메일을 통해 팬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에 더 큰 괴로움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대표팀 수비수들이 가장 크게 질타를 받은 아시안컵 대회 이란과의 8강전에 대해 당시의 상황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2001년 대표팀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4골이나 먹다보니 정신이 혼미해질 수밖에요. 첫골을 먹었을 때는 (이)민성이한테 안정적으로 수비하고 상대 선수를 놓치지 말자고 의지를 다지고 격려를 하기도 했는데 또 다시 골을 먹으니까 정말 어이가 없더라구요. 미드필드에서 워낙 쉽게 뚫렸어요. 중앙에서 무너지니까 속수무책이었죠. 귀신에 홀린 기분, 그때 처음 느꼈어요.”
3-4로 패하고 경기장을 빠져나올 땐 너무나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단다. 자신의 무능력에 한숨짓고 공격수들에게 미안하고 마치 모든 패인이 자신한테 있는 것처럼 최진철은 죄인의 심정이 되었다고 한다.
최진철은 인터뷰 중간중간에 ‘형님’ 홍명보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홍명보를 만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제가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싶어요. 지금 은퇴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좀 더 해도 되는 건지를 정말 물어보고 싶어요.”
은퇴를 번복할 생각이 있냐고 묻자 최진철은 “다시 도전해서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 짓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 그게 가능할까요?”라며 긴 여운을 남긴다.
과연 최진철의 은퇴는 누가 결정해야 하는 건지 기사를 작성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리송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