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당파 응징” VS “친노계 각오하라”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전면전을 시작했다. 양당 모두 표적공천을 앞세워 보복 정치의 칼을 빼 들었다. 더민주는 호남과 수도권 탈당파 지역구에, 국민의당은 친노(친노무현)계 핵심 인사 지역구에 각각 맞춤형 공천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른바 ‘자객공천’이다. 설 연휴 전후로 여의도 정가에는 ‘자객공천 리스트’가 떠돌았다. 명분은 새 인물 공천(더민주)과 친노 심판(국민의당)이다. 속내는 ‘처절한 응징’이다. 친노계와 탈당파에 대한 응징을 통해 야권 주도권 확보에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결말은 알 수 없다. 자객공천이 야권 바람의 진원지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야권 분열의 원흉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양당 중 한 쪽은 공천 피바람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위험한 승부수다. 이미 물밑에선 숨 막히는 벼랑 끝 전쟁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2월 1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성장론 정책기자회견에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강철규 유능한경제정당위원회 공동위원장(왼쪽에서 세 번째)의 발언을 듣고 있다. 박은숙 기자
여의도 정가에 자객공천이란 말이 흘러나온 시기는 지난 1월 초다. 문재인 당시 더민주 대표가 2·3호 영입인사로 전북 정읍 출신의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과 이수혁 전 주 독일대사를 잇달아 영입하자, 당 안팎에선 선도 탈당파인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을 겨냥했다는 주장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입 역할을 맡은 문병호 의원은 “친노가 있는 지역구에는 특별한 공천을 할 것”이라며 친노 자객공천을 노골화했다. 이에 더민주 주류인 진성준 전략기획위원장은 “탈당한 지역에는 유능하고 참신한 인물을 공천하게 될 것”이라고 사실상 전쟁을 선포했다.
2월 2일 대전 한밭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창당대회에서 공동대표로 추대된 안철수 의원(오른쪽)이 당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최준필 기자
자객공천은 지난 2005년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가 자신의 핵심 정책인 우정 민영화에 반대한 이들을 자민당 공천에서 탈락시킨 데서 유래했다. 당시 고이즈미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은 좋지 않았다. 고이즈미 내각의 핵심 개혁안인 우정 민영화법은 암초에 걸렸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반대 기류가 커지면서 여권 분열이 현실화됐다. 총선을 거치면서 사실상 레임덕에 처하게 될 것이란 우려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고이즈미는 ‘개혁을 막지 마’라는 단순한 총선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고 도쿄대 출신 미모의 여성 관료와 유명 여배우 등을 전략공천했다. 이로써 고이즈미는 총선을 단숨에 ‘개혁 vs 반개혁’ 구도로 만들었다. 사무라이를 연상케 하는 고이즈미의 ‘자객 전술’이 일본 총선 판을 뒤흔든 셈이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총선을 앞두고 한국판 자객공천을 꺼낸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상대를 한 번에 저격해 단숨에 쓰러트리는 ‘원 샷 원 킬’로 총선에서 새누리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겠다는 전략적 셈법이 숨어있다는 의미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에 따르면, 현재 자객공천의 핵심 승부처는 10곳 정도다. 특히 호남과 수도권에 집중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양당이 호남과 수도권을 핵심 승부처로 보고 있는 셈이다. 이 중 호남은 자객공천을 둘러싼 수 싸움의 백미로 꼽힌다. 더민주는 국민의당 권은희·유성엽 의원의 지역구인 광주 광산을과 전북 정읍을 대표적인 자객공천지역으로 삼았다.
광산을은 최근 복당한 이용섭 전 의원, 정읍은 문재인 전 대표의 영입 2·3호인 이수혁 전 수석대표와 김병관 의장 등이 당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더민주 관계자는 “19대 국회 임기를 나눠 가진 ‘이용섭 vs 권은희’, ‘새 인물 vs 탈당파’ 구도인 정읍이 호남 총선의 최대 격전지”라고 잘라 말했다. 두 지역구 결과는 야권 구도의 핵심인 ‘친노 심판’의 리트머스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더민주는 ‘강운태 카드(광주 남구)’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복당이 임박한 강운태 전 광주시장을 배치, 장병완 국민의당 의원에 맞선다는 복안이다. 여기에 인구 하한선에 못 미치는 동구가 합쳐질 경우 박주선 국민의당 의원까지 가세하는, ‘광주 동남풍 전쟁’이 총선을 뒤흔들 것으로 보인다. 문 전 대표의 영입대상 중 광주·전남 출신 3인방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오기형 변호사·김민영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도 유력한 더민주의 자객공천 대상자다.
당 내부에선 합구가 예상되는 광주 동구와 남구에 양 전 상무와 오 변호사를 동반 출격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오 변호사는 “광주를 포함해 어디든 상대 당(국민의당) 현역 의원이 나오는 곳에 출마할 것”이라며 자객공천론에 힘을 실었다. 더민주는 이미 영입인사를 다양한 지역구에 맞춘 시뮬레이션 작업을 마친 상태다. 경우에 따라 양 전 상무는 수도권 ‘적진’에 차출될 수도 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의 경우 안대희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나선 서울 마포갑 출마설이 제기된다.
국민의당도 범친노인 강기정 더민주 의원의 지역구 광주 북구갑에 표적공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지역은 손학규계인 김유정 전 의원을 비롯해 종합편성채널 토론 패널로 유명세를 떨친 김경진 변호사, 진선기 전 광주시의회 의원, 홍인화 전 광주시의회 의원 등이 예비후보로 등록한 상태다. 이 중 친노계와 선명성 경쟁을 벌일 수 있는 ‘김유정 카드’를 낙점할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국민의당 관계자는 “저쪽이 사실상 표적공천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 아니냐”라며 “양측 모두 자객을 준비해 나서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수도권 지략 대결’도 본격화됐다. 더민주는 서울 노원병(안철수 공동대표)과 광진갑(김한길 의원)에 이동학 전 혁신위원·황창화 전 국회도서관장과 전혜숙 전 의원 등의 출격 채비를 마친 상태다. 황 전 관장은 연일 안 대표를 향해 “정치를 그만두라”라고 압박하고 있다. 국민의당은 서울 관악갑(유기홍 의원)과 금천(이목희 의원), 관악을(정태호 예비후보)에 김성식 전 의원과 정두환 극동대 겸임교수, 박왕규 더불어사는행복한관악 이사장 등이 속속 출마채비를 마쳤다.
김성식 전 의원과 박왕규 이사장은 안 대표의 최측근으로 통한다. 정 교수는 19대 총선 때 당내 여론조사 공천 조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밀실공천, 여론조사 조작 의혹 규명을 위한 민주후보연대’를 조직한 핵심 멤버다. 이들은 당시 서울 종로(정세균 의원)를 비롯해 △금천(이목희 의원) △은평갑(이미경 의원) △강북갑(오영식 의원) △도봉을(유인태 의원) △노원을(우원식 의원) △경기 남양주갑(최재성 의원) △화성을(이원욱 의원), 8곳의 여론조사 부정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밖에도 국민의당은 경기 안양·동안갑(이석현 의원)과 군포(이학영 의원), 광명갑(백재현 의원) 등에 각각 임재훈 전 더민주 조직본부장·곽선우 전 성남 FC 대표, 정기남 전 더민주 원내대표 특보, 서현준 전 더민주 정책위 부위원장 등의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서울 구로갑(이인영 의원)과 경기 고양 덕양을(문용식 예비후보)에선 장진영 대변인과 이태규 전략홍보본부장 등을 내세울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더민주는 안산 상록을(김영환 의원)에 김철민 전 안산시장과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변호사를 표적공천하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자객공천이 ‘양날의 칼’이라는 데 있다. 1차적으로 각 당의 공천 과정에서 당내 파열음의 원인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크다. 대표적인 곳이 비노계 노웅래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마포갑이다. 김종인 비대위가 이곳에 ‘표창원·조응천’ 카드를 꽂으면 노 의원이 반발하며 탈당을 감행할 수 있다. 이 경우 김종인 체제에서 한풀 꺾인 야권 발 엑소더스의 불이 다시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당도 마찬가지다. ‘박 자매(박선숙 사무총장·박주현 최고위원 겸 당규제정 TF팀장)’ 라인이 공천 칼자루를 쥔 만큼, 더민주 탈당파에 대한 현역 물갈이는 불가피하다.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의 측근인 이들이 호남 현역 물갈이를 단행한다면, 내부 알력설이 수면 위로 급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탈당파 관계자는 “우리 당 소속 의원들은 기득권 없이 경선에 참여하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인위적인 물갈이는 안 된다”고 날을 세웠다.
각 당이 자객공천에 따른 후유증을 조기에 차단하지 못할 경우 이후 범야권 연대·연합 작업도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객공천이 곱셈 정치는커녕 ‘뺄셈 정치’의 대명사로 전락할 가능도 농후한 셈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더민주가 야권의 판을 이끌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양당의 자객공천은 주도권 쟁탈전의 성격이 강하다”며 “이를 통해 새누리당의 입지가 줄어들 수는 있지만, 야권이 새누리당을 압도하는 데 실패할 경우 오히려 야권분열에 따른 전패의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자객공천은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