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도 ‘인연’으로… 탁월한 ‘작업맨’
▲ 3월 24일 김재록 인베스투스글로벌 고문이 로비의혹과 관련.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등의 혐으로 구속되었다. | ||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궁금증은 ‘고졸 출신의 베일에 싸인 인물인 김 씨가 어떻게 해서 국내 금융계를 좌지우지할 거물로 성장했을까’하는 점. 하지만 김 씨는 과연 명성 그대로 ‘인맥 만들기의 탁월한 귀재’였다. 그는 아무리 사소한 인연이더라도 한번 맺으면 절대 놓치지 않고 자신의 배경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맥은 자기복제를 거듭하며 새로운 인맥을 창출해 나가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인맥은 과거 DJ 정권에서 그치지 않는다. 실제 그의 인맥 바이러스는 현 참여정부에도 상당부분 퍼져 있고 또 어디까지 더 퍼져 나가 있을지 검찰조차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론스타 주변의 인사들에게까지 전염돼 있다.
김재록 씨에게는 많은 별칭이 따라 붙었다. 그는 지난 97년 선거판에 몸담고 있을 당시 자신을 스스로 ‘정치적 건달’로 지칭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과거 이력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고 하기보다는 건달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김 씨의 과거는 대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그의 출생 연도부터 학력까지 어느 것 하나 명쾌한 것이 없다. 57년생으로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과거의 일부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호적에 김 씨는 60년생으로 나와 있다. 그는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최종 학력은 77년 2월 금오공고 졸업이었다. 금오공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73년 고향인 경북 구미에 ‘동양 최대의 최첨단 공업인 육성 학교’를 기치로 내걸고 세운 학교였다. 당시 이 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등 전국에서 가난한 수재들이 모여든 선망의 대상이었다.
김 씨의 인맥 가운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유일한 학맥인 금오공고 동문 인맥도 상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이 학교의 2회 졸업생이다. 금오공고의 초창기 졸업생 가운데는 고시 합격을 통해 법조인이나 행정공무원이 된 인사들이 유독 많다.
이 학교는 고교로는 드물게 교내에 학군단을 설치하고 졸업생들에게 부사관으로 복무할 수 있는 특전도 줬다. 김 씨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부사관으로 근무하게 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80년대 그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그는 미국에 유학했고 시민단체 활동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확인된 것은 90년대 이후 그의 행적이다. 그는 89년 여행사를 운영했고, 92년 한화기획이라는 기획사를 운영했다. 그리고 94~95년경부터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김 씨가 어떻게 당시 여권의 거물급 실세인 이 전 총리와 친분을 맺게 됐을까. 베일에 싸인 의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거물 브로커로 성장하기까지 모든 인맥의 기초는 공교롭게도 이 전 총리와의 관계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일요신문>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학연과 지연 등의 연결고리가 전혀 없던 두 사람의 인연은 엉뚱하게도 ‘러시아 여행’으로 맺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95년 이 전 총리(당시 민자당 4선 의원, 국회부의장)의 특보 명함을 들고 지역구인 포천으로 찾아온 김 씨를 처음 만났다는 Y 씨는 “김 씨는 당시 이 전 총리에게 어떻게 하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때였다. 당시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서 알아본 결과, 김 씨는 러시아와 중국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를 운영했으며 이 전 총리와는 러시아 여행 주선을 계기로 친분을 쌓은 것으로 들었다”고 밝혔다.
자그마한 인연을 절대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인맥으로 활용하는 수완을 김 씨는 이때부터 발휘하기 시작, 이후 엄청난 인맥의 군단으로 키워나갔다. 그가 중앙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7년 여권 9룡의 대권 다툼 때. 그는 이 전 총리 캠프의 대외창구역을 맡으며 기자들과 인연을 쌓아 나갔다.
당시 그는 특유의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과 판을 짜는 기획력으로 이 전 총리 캠프를 사실상 주도했다. 이 전 총리가 당내 경선에서 탈락한 직후인 97년 7월, 그는 당시 부도위기에 놓인 기아경제연구소에 홍보이사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김 씨를 영입하는 역할을 했던 기아차의 고위 임원은 “그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든 기아를 살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놀고 있는 사람을 픽업한 것”이라고 밝혔다. 여권 실세의 특보를 지낸 그의 이력이 고려됐음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여기서 그는 당시 기아자동차의 법정관리인으로 회장을 맡고 있던 진념 전 경제부총리를 만났다. 단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는 진 전 부총리와 친분을 쌓았다. 결국 기아차의 회생 불가 쪽으로 판세가 넘어갈 즈음, 그는 일생일대의 결정적 기회를 잡게 된다. 바로 DJ 캠프로의 진입이다.
이 과정에도 어김없이 이 전 총리의 배경이 뒤따랐다. 그는 김중권 전 청와대비서실장이 당시 운영하던 마포 사무실에 출입하며 얼굴을 내밀었다. 전남 영광 출신인 점도 십분 활용했다. 그리고 DJ 캠프의 총괄 브레인 역할을 한 이종찬 기획본부장 밑에서 일했다. 김 전 실장과 이 본부장은 이 전 총리와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권에 영입된 ‘동기’들이었다.
김 씨는 기획본부에서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지만 전략기획특보라는 명함으로 선거판을 누볐고 실제 당시의 활약으로 그는 DJ 당선 직후 언론사 등에 의해 ‘DJ 정권에서 중용될 인물 2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기획본부에는 이해찬 정동영 임채정 배기선 전병헌 등이 포진해 있었다. 그는 지난해 4월 한 대학의 특강에서 “이해찬 총리, 정동영 전 당의장 등과 친하다”며 현 정권 실세와의 친분도 적극 과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DJ의 대선 승리는 김 씨의 운신에 그야말로 날개를 다는 격이었다. 특히 이종찬 본부장이 98년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맡으면서 그도 날개를 달아 인맥을 넓히는 결정적 기회를 잡게 된다. 오늘날 김 씨 인맥의 결정판인 이헌재 전 부총리와의 인연도 이때부터 형성됐다.
정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김 씨는 이종찬 위원장의 특보 명함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 전 부총리의 한 최측근은 지난 3월 28일 한 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 씨는 당시 정부조직진단반장이었다. 그 직책을 활용해 그는 당시 수많은 정·관·재계 및 금융계 인사들을 접촉했다”고 밝힌 점은 주목된다.
정부조직진단반장이란 직함은 공식직함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당시 이 위원장이 가장 강조한 인수위의 양대 역점 사업이 외환위기 돌파와 정부조직의 효율적 축소였다. 위원장 특보 명함을 들고 다닌 김 씨가 이 위원장의 지시에 의해 그런 역할을 개인적으로 수행하며 보고서를 올리는 일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맞은 당시 재계와 금융계 인사들의 긴장감은 상당했다고 한다. 특히 IMF 시기였기에 그 위기감은 더했다. 당시 인사들은 DJ 인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 씨는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하며 자신의 파워를 키워나갔다. 당시 이 전 부총리는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을 맡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김 씨와 접촉이 많았다. 특히 두 사람 사이에는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장이 있었다. 오 전 회장은 이 전 부총리와 속내를 주고받을 만큼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김 씨와도 상당한 친분을 갖고 있었다. 오 전 회장의 도움으로 김 씨는 이때부터 이헌재 사단으로 편입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김 씨가 오 전 회장과 친해지게 된 계기에도 이 전 총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 이 전 총리와 오 전 회장은 경복고 동문이다. 이 전 총리 캠프에서 일했던 김 씨는 당시 인맥 관리 차원에서 경복고 동문을 두루 접촉했다. 경복고 출신들조차 김 씨를 동문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는 당시 경복고 동문들과 친분을 쌓아 나갔다.
DJ 당선 직후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계법인인 아더앤더슨의 한국지사장을 맡게 된다. 이 또한 의문으로 자리잡는 대목. 국내에서 뚜렷한 명함과 이력도 없는 그가 어떻게 이런 거대한 회사의 한국지사장을 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이 분분하다.
김 씨와 접촉해본 적이 있다는 대기업 출신의 한 경제계 인사는 “김 씨가 미국에 자주 왔다갔다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영어도 꽤 능통했다. 자신이 DJ 정권의 실세 및 아들과 친하며 앞으로 신정부에서 할 일이 많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했다. 그는 그런 과시를 상당한 근거로 뒷받침하면서 교묘하게 내보이는 비상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다. 미국에서도 그런 자기 과시가 먹혀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이성헌 전 한나라당 의원이 2001년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김 씨를 둘러싼 의혹을 소개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미국 교포 인맥인 김 아무개 씨, 한 아무개 씨 등과의 친분을 거론한 점이다. 당시 미국 한인사회에서도 DJ 당선에 고무된 인사들이 상당했고 새 정권의 막후 실세를 자처하는 부적절한 인사들이 한인사회에 상당수 퍼져 있었다는 것이 교포 사회 관계자의 전언이다.
아무튼 전 대통령직인수위원장 특보, 현 아더앤더슨 부회장의 명함을 갖고 있던 김 씨는 이제 본인이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주요 인사들이 모여들 정도로 급성장했다. DJ의 처조카인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와 이정택 씨는 아더앤더슨의 총회장과 고문을 맡기도 했다.
김 씨의 인맥은 현 정부에서도 무시 못 할 수준으로 뻗어 있었다. 현재 김진표 교육부총리,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등 숱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심지어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이름까지도 나올 정도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하나의 인연을 갖고 열 개의 새로운 인연을 만들 줄 아는 능력을 가진 김 씨가 뿌리가 같은 현 정권의 주요 인사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만들었음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에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김석동 전 금감원 감독정책1국장 등도 이 전 부총리, 진 전 부총리 등과의 인연을 끈으로 해서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씨의 인연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한 파장은 얼마나 클지 귀추가 주목된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