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신문>과 인터뷰중 모습.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12월 한달을 누구보다 바쁘고 뜻 깊고 행복하게 보냈던 이운재였다. K-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팀 우승과 독일과의 친선전에서 발라크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며 한국팀에 승운을 안겨준 ‘행운의 주인공’은 이후 다양한 ‘뒤풀이’에 참가하느라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는 중이었다. 말수가 적은 건 사실이지만 한번 봇물이 터지면 개그맨 못지않은 어휘 구사력으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드는, 정말 만나고 싶었던 이운재를 2005년이 시작되기 사흘 전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만났다.
[패션쇼] 턱시도 상의를 벗고 하얀색 와이셔츠만 입은 채 기자와 마주 앉은 이운재의 얼굴이 이전과는 좀 달라보였다. 어디가 달라진 걸까. 아! 엷게 화장을 한 것이다. 물론 인터뷰를 위해 화장을 했을 리 만무하다. 두 시간 후면 시작될 K-리그 시상식 오프닝쇼로 벌어질 패션쇼 출연 때문이었다. 옷차림도 그렇고 얼굴 화장까지…. 하여튼 오늘 기자가 본 이운재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당분간 보기 힘든 ‘명장면’을 연출했다. 보는 사람도 이 지경인데 정작 자신은 얼마나 어색할까.
“그래도 1년 전에 ‘앙선생님(앙드레 김)’ 패션쇼에 서본 경험이 있어 조금 나은 편이에요. 오늘 리허설하면서 무대 위에서 스텝을 밟아보는데 제대로 나오더라구요.”
지난번 패션쇼보다 오늘 하는 패션쇼에 더 기대를 갖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이전 패션쇼에서 입은 옷은 공짜로 줘도 못 입고 다닐 옷들이었지만 오늘 입은 정장은 ‘앙 선생’이 선물로 준다고 미리 귀띔을 해줘 여간 기분이 ‘업’된 게 아니었다.
[체중] 옷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다 화제가 체중 문제로 옮겨갔다(아무래도 뱃살 운운하며 이운재를 자극한 탓이 크다). 이운재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체질이다.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량을 늘려도 별다른 소용이 없는 케이스. 적게 먹어도 체중과 연결되는 탓에 오래 전부터 체중을 줄이기보다는 체중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한다.
“체중조절과 관련해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음식을 조절하면 경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무리해서 식사량을 줄이지 않아요. 살 빼려고 했다가 경기 망치는 경우가 다반사거든요. 월드컵 때요? 그땐 군인이었잖아요. 절로 빠졌죠. 이렇게 말하면 건방지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몸으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잖아요. 유지되든가, 찌든가 둘 중 하나예요. 살은 절대 안 빠져요.”
이운재는 원래 공격수 출신이다. 그러나 체중을 빼는 것과 90분간 뛸 자신이 없어서 공격수를 포기하고 골문을 지키게 됐다고 한다. 만약 ‘업종 변경’을 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은퇴했을 것이란다. 지금도 달리기는 대표팀에서 꼴찌라고.
“김영광 선수가 달리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면서요?”라며 슬며시 이운재의 표정 변화를 살펴봤다.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이운재는 이렇게 대답한다.
“골키퍼가 잘 뛴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지구력보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집중력이 더 중요하거든요. 영광이가 잘 뛴다고 스트레스 받은 적 한 번도 없었어요.”
[라이벌] 2002월드컵 직전 이운재는 김병지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벌였다. 월드컵을 정점으로 해서 김병지는 대표팀에서 밀려났고 이운재는 ‘붙박이 주전’으로 지금까지 대표팀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운재는 김병지와 경쟁을 벌이며 알게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언론이었다.
“당시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고 날 흥분하게 만들었던 건 (김)병지 형이 아니라 언론이었어요. 자꾸 둘을 라이벌로 부추기다 보니 괜한 구설수에 휘말렸고 오해를 사기도 했거든요. 그런 내용의 기사에서 나에 대해 좋게 쓴 내용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악에도 바쳤고 오기도 생기고, 그랬죠.”
▲ 지난 12월29일 2004K리그 시상식 전 패션쇼에서 ‘중심’을 잡은 이운재. | ||
“난 라이벌이 없었어요. 진정한 라이벌은 내 자신이었으니까. 내가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과의 경쟁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후계자] 월드컵 이전 김병지와 한 방을 썼던 이운재는 월드컵 이후 대표팀에서 1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김영광과 룸메이트가 됐다. 선배보다 후배와 함께 생활하는 게 편하긴 했지만 후배에게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 의식은 표현 못할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솔선수범이라는 단어가 딱 와 닿더라구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거, 쉽지만은 않아요. 그래도 후배와 같이 지내면서 나 또한 묘한 긴장감을 갖게 돼 그건 좋더라구요.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면 나도 노력해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영광이가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몰라도 난, 내 후계자를 영광이로만 단정짓고 싶지 않아요. 영광이 외에도 실력있는 골키퍼는 아주 많거든요.”
이 부분은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 이운재는 나이가 어린 김영광이 벌써부터 대표팀 붙박이 골키퍼로 인식되는 건 선수 자신에게 득될 게 없다고 봤다. 자칫 자만심에 빠질 위험도 크다는 것이다.
“나도 경험한 부분이에요. 자리가 고정돼 있다고 생각하면 노력하기가 힘들어요. 모든 선수들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해요. 그래야 서로 발전이 있어요.”
[독일전] 이운재는 2006독일월드컵 예선전을 치르며 안타깝고 답답했던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토로한다. 특히 베트남, 오만, 몰디브전에서 패하거나 비겼던 결과는 아무리 곱씹어도 수치스럽고 이해가 안 되는 경기였다. 이유는 한 가지. 선수들의 자만심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골대 앞에 서 있으면 선수들 움직임이 다 보여요. 옛날(월드컵 때)과 지금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한눈에 보이거든요. 예전처럼 끈질기고 악착같은 모습, 자신을 희생하려는 모습들이 없어졌을 때 어이없는 패배가 나타났죠. 그런 점에서 지난 독일과의 평가전은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줬을 거예요. 특히 해외파 선수들은 뜨끔했을 걸요. 아무리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다고 해도 태극기가 휘날리지 않는다면 자신의 명예도 없는 거잖아요.”
[패널티킥] 가장 잊지 못할 PK를 꼽아달라고 주문했다. 이운재는 한참 생각에 잠기다가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김병지의 슛을 막았던 장면도, 독일전에서 발라크의 골을 쳐냈던 순간도 아닌 고등학교 시절, 대학 진학을 앞두고 벌였던 축구대회를 떠올렸다.
“대학을 가려면 무조건 4강에 들어야만 ‘명함’을 내밀 수 있었어요. 그때 치렀던 대회에서 페널티킥을 막은 덕분에 우리 팀(청주상고)이 4강에 올랐죠. 그래서 페널티킥하면 고등학교 때가 가장 많이 생각나요.”
▲ 지난 12월19일 열린 독일전 후반 김영광과 교체되는 이운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비밀인데… 하하. 상대방을 속이는 거죠. 선수는 날 속이기 위해 찰 것이고 난 그 ‘유혹’에 속지 않고 내가 생각한 코스대로 선수가 찰 수 있게끔 유도하기 위해 엉덩이를 흔들어요.”
실패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골을 막은 횟수보다 골을 먹은 횟수가 더 많다고 기억될 만큼 가슴 아픈 장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
“가끔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방향을 예측하고 움직일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요. 선수가 공에다 발을 대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다가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거든요.”
챔피언 결정전에서 김병지와 맞섰던 12월12일 포항과의 결승전 상황을 끄집어냈다. 김병지의 골을 쳐낸 후 두 손을 들고 운동장을 뛰며 포효했던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다.
“병지 형이 ‘희생양’이 된 셈이죠. 병지 형의 골을 막았다는 것보다 우승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살기 위해선 막아야죠. 그 상대가 누가 되든 간에.”
독일팀 주장 발라크의 골을 막았을 때는 한국팀에 승리 요건을 안겨주는 데 힘이 됐다는 점에서 이운재를 달뜨게 만들었다고 한다.
돈을 벌려고 축구를 시작했다는 이운재에게 이젠 ‘배가 부르냐’고 물었다.
“많이 안 벌었는데요? 지금부터 시작인 걸요. 배가 부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프지도 않아요. 더 노력해서 더 많이 벌어야죠. 하하.”
운동을 한 시간보다 운동할 시간이 더 짧게 남아 아쉽다는 이운재. 어느덧 대표팀 주장으로 자리매김하며 리더십을 키우고 있는 그는 대표팀 ‘완장’에 대해 이런 소회를 밝힌다.
“완장을 차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차보니까 놓치고 싶지 않더라구요.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열심히 할 겁니다. ‘자리’는 영원하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