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호 | ||
결국 폭우가 화근이었다. LA에 내린 비는 정전사태까지 몰고 올 만큼 강렬했다. 잔디구장에도 빗물이 가득 고이면서 대표팀 훈련이 꼬이기 시작했다. 대표팀에 훈련장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남가주대측이 천연잔디구장 보호를 위해 사용을 불허한 것. 본프레레 감독은 협회에 “천연잔디구장을 반드시 구하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수소문 끝에 대표팀은 훈련시작 6일 만에 가까스로 잔디를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동네 운동장 수준이라 라인도 그려있지 않았고 잔디라기보다는 풀밭에 가까웠다. 풀의 높이도 둘쭉날쭉. 압권은 풀 속에 숨어있는 ‘개똥’이었다. 선수들이 개똥을 밟지 않도록 훈련 장비로 위험 지역을 경고했을 정도. 그래도 인조잔디가 아닌 것이 감사했던지 본프레레 감독은 오후에도 이곳을 찾았다가 오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개똥이 또 나오자 ‘콘’(훈련 때 쓰는 삼각뿔)으로 슬그머니 제거하는 임기응변을 보여줬다.
대표팀의 숙소는 LA시내의 N호텔. 그동안 축구대표팀이 LA를 방문했을 때 투숙하던 곳은 R호텔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호텔을 바꾼 것은 과거 R호텔에서 선수들의 귀중품이 도난당한 적이 있는 것도 한몫했다. 옮기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표팀의 호텔 주변이 살벌했던 게 흠. 예전의 R호텔은 한인타운 인근에 있어 선수들이 걸어서 한국음식과 교민들을 접하기에 수월했다. 그러나 다운타운을 지나 위치한 이번 호텔은 슬럼가와 맞닿아 있었다. 가뜩이나 LA다운타운은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한 곳인데 호텔 옆에 거리의 부랑자들과 노숙자들이 가득해 분위기가 더욱 심상치 않았다. 선수들이 밤에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호텔문을 나서면 만나는 슬럼가 때문이라도 외출은 언감생심이었다.
이번 전훈에서 취재진을 빼고 외부인 중 대표팀과 가장 많이 접촉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홍명보다. 오는 3월 ESL(영어교육)과정을 시작하기 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는 홍명보는 훈련장에 출근 도장을 찍듯이 매일같이 후배들을 찾아 격려했다. 홍명보의 열의는 두 아들을 대표팀 평가전에 깜짝 출연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홍명보는 대표팀의 현지 마지막 평가전인 스웨덴전 때 큰 아들 성민과 둘째 정민군을 한국선수들과 손을 잡고 입장시킨 뒤 관중석에서 흐뭇하게 지켜봤다. 둘째 정민군은 대표팀의 주장인 이운재와 짝을 이뤘고 큰 아들 성민군은 동생 뒤에서 입장했다. 태극마크를 내놓은 아빠 대신 두 아들들이 오랜만에 대표팀과 아빠의 인연을 맺어준 셈이다.
콜롬비아전, 파라과이전 등 대표팀의 1·2차 평가전 때 관중석을 술렁이게 한 인물은 메이저리거 박찬호. 당초 대표팀의 훈련장소였던 남가주대에서 개인훈련을 하던 박찬호는 가족들을 대거 동반해 콜리세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박찬호는 LA에서 합동훈련을 한 한양대 선배 구대성에게도 제안을 해 이들은 2차전 때 함께 관전했다. 흥미로운 것은 구대성의 축구장 나들이가 처음이라는 것. 구대성은 “오늘 처음 왔는데 경기가 그냥 그렇다”고 말했다.
정말 재미없었던 걸까. 박찬호와 구대성 모두 팔짱을 낀 채 운동장을 조용히 응시했다. 공교롭게도 박찬호는 히딩크 감독시절인 2002골드컵 때 본 두 차례 경기를 포함해 이번 1,2차전까지 네 번을 직접 봤지만 한국이 승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크리스천 태극전사들의 믿음은 LA에서도 계속됐다. 김동진은 한국에서 가져온 성경책을 보며 방에서 기도를 드릴 정도.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심은 스웨덴전 다음날인 25일 절정에 달했다. 유일하게 본프레레 감독이 모든 훈련을 취소한 채 자유시간을 줬는데 김동진 김영광 김치곤 김동현 최성국 등은 현지 시간으로 일요일인 이날 오전 성경책을 들고 한인교회로 향했다. 반면 다른 선수들은 30분 뒤 대표팀 버스를 타고 1시간20여분을 달려 대형할인매장으로 쇼핑을 나가 대조를 이뤘다.
본프레레 감독의 과욕일까, 열정일까. 본프레레는 LA에서 계획된 세 차례의 평가전 외에 미국과 한 차례 더 친선전을 갖기로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본프레레는 현지에서 미국월드컵대표팀 감독이 스웨덴전 이후 미국과의 비공개 평가전을 제안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16일 콜롬비아전, 20일 파라과이전, 23일 스웨덴전 등 일주일에 무려 3경기를 했는데도 본프레레 감독은 스웨덴전 이틀 후인 25일 미국과의 경기를 또 추가시켰던 것. 그는 앞선 세 차례의 평가전에서 많이 뛰지 못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미국전을 치르려고 했다고 한 코칭스태프가 전했다. 하지만 감독의 구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미국국가대표선수들이 파업을 철회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대표팀 1진들이 파업을 단행한 뒤 하부리그 선수들로 상비군을 꾸렸고 그들을 데리고 한국과의 평가전도 계획했다가 갑자기 파업이 풀리자 ‘훈련도 제대로 안된 1진들이 한국에 지면 망신이다’는 이유로 경기를 전격 취소했던 것이다.
미국 LA=송호진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