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숙하게 넣어둔 X파일 ‘만지작’
▲ 현대차 비자금과 관련, 사법처리 가능성이 관측되면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대선자금 파일을 공개하는 ‘반전 카드’를 꺼낼 것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 부자에 대한 소환 조사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정치권과 재계 주변에선 벌써부터 정 회장 부자에 대한 사법처리 수위를 놓고 이런저런 추측이 나돌고 있다. 일각에선 정 회장 부자 모두의 사법처리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경영권 승계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부자 사법처리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정 회장과 현대 측의 대응 카드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현대 측은 이미 초호화 변호인단을 구성해 검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정 회장도 나름대로 ‘반전카드’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게 재계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대 정부·국민 유화책으로 삼성식 사재 출연 방안도 거론되고 있으나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권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대반전 카드’를 마지막 승부수로 꺼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그렇다면 정 회장이 꺼내들 수 있는 ‘대반전 카드’는 무엇일까. 일부 정치권과 재계 관계자들은 대선자금 뇌관을 건드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3년 8월 SK 비자금 사건으로 촉발된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2004년 5월 9개월여 만에 막을 내렸지만 국민적 의혹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했고 형평성 문제 등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2004년 5월 21일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마무리한 검찰은 현역 국회의원 23명을 포함해 40여 명의 정치인과 20여 명의 기업인을 사법처리했다. 하지만 검찰은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최정점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를 불입건 처리했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재계 핵심 인사들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줬다.
특히 검찰은 천문학적인 불법자금을 정치권에 지원한 삼성(385억 원)·현대(106억 6000만 원) 등 재벌총수들은 단 한 명도 입건하지 않고 해당 그룹의 전문경영인들을 사법처리하는 데 그쳤다. ‘살아있는 권력’을 비롯한 정치권의 뿌리 깊은 불법 정치자금 관행에 대해 대대적인 메스를 가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재계에는 여전히 관대한 검찰’이란 오명을 씻지 못한 성적표였다.
당시 참여연대는 ‘용두사미 수사’라는 논평을 통해 “기업인 수사에 대해서는 비자금의 조성 경위나 실질적 책임자에 대한 수사는 아예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검찰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며 수사를 종결한 만큼 미진한 사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특검을 통해 수사를 완결지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 검찰 수사결과 드러난 불법 정치자금(943억 원)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대선 전후로 정치권에 전달된 자금도 검찰 발표(한나라당 823억 원, 노무현 후보 캠프 120억 원 등)보다 훨씬 많을 것이란 의혹도 끊이질 않았다.
검찰의 현대 비자금 수사로 벼랑 끝에 몰린 정 회장이 최악의 경우 마지막 카드로 대선자금 파일을 꺼내들 것이란 관측도 바로 이러한 시각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미완의 수사’로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산적한 대선자금 파일은 여전히 정치권을 대혼란으로 빠뜨릴 수 있는 핵뇌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권 일각에선 현대차 계열사인 글로비스 비밀금고에서 발견된 69억 원의 비자금은 현대가 2002년 대선 때 정치권에 지원하고 남은 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일 언론에 일부 내용이 공개된 ‘김재록 로비 의혹과 관련된 현대차 비자금 수사’라는 한나라당 내부 문건에는 이러한 의혹과 함께 “검찰의 현대차 비자금 수사는 2002년 대선자금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담겨져 있다.
문건에는 또 글로비스 관계자 말을 인용해 “검찰이 글로비스에 대한 압수수색과 전·현직 직원에 대한 조사에서 현대차가 비자금을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정황을 잡고 이를 집중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청와대 국정상황실에서 검찰 수사 내용을 다 파악하고 있는 만큼 이 내용이 언론에 공개될 경우 5·31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지난 불법대선자금 수사 이후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상당기간 정치적 시련기를 보내야 했던 만큼 검찰 수사가 2002년 대선자금까지 확전될 경우 또다시 악몽이 되풀이될 수 있음을 우려한 분석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칼날을 치켜세운 작금의 검찰 분위기는 현대 비자금뿐 아니라 과거 대선자금까지도 다시 들춰낼 기세다. 하지만 검찰이 현대의 비자금 규모와 출처를 규명할 수는 있어도 과거 대선자금까지 연계해 그 용처를 파헤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이 경우 무엇보다도 검찰 스스로 지난 불법대선자금 수사가 ‘부실수사’였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또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선자금을 다시 수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치권을 총체적 혼돈상태에 빠뜨릴 소지가 많다.
여기에 대선자금 수사를 전면적으로 재개할 경우 이회창 전 총재나 한나라당뿐 아니라 노 대통령과 여권도 검찰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 검찰이 스스로 발등을 찍으면서까지 살아 있는 권력과 다시 전쟁을 치를 리 만무하다는 분석이 일견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하지만 벼랑 끝에 선 정 회장 입장에서는 정치권과 검찰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자신이나 아들, 둘 중 한 사람 내지는 최악의 경우 부자가 동시에 사법처리될 위기에 몰린 만큼 어떤 식으로든 그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이 작정하고 드러나지 않은 대선자금 내역을 공개한다거나 검찰 조사 과정에서 정·관계에 제공한 비자금 용처를 낱낱이 진술할 경우 여야를 막론하고 여의도 정가는 한순간에 대격랑 속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실제로 글로비스가 비자금을 조성했던 시기는 2001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로 현대차가 지난 2002년 대선 직전 100억 원을 한나라당에 건넨 시기와도 일정 기간 겹치는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여기에 “2002년 대선 당시 계열사에서 거둬들인 현금 뭉치를 인쇄용지 박스 40~50개에 담아 날랐다”는 등 현대비자금과 관련한 현대차 관계자들의 증언도 언론을 통해 속속 제기되고 있다.
마치 ‘미완’의 대선자금 사건을 재점화시킬 수 있는 대형 뇌관이 곧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 주변에서 대반격 움직임 내지는 대선자금 X파일 공개 가능성을 흘리면서 여권에 무력 시위를 전개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섣부른 관측까지 내놓고 있다. 정 회장이 대선자금 뇌관을 최후 협상 카드로 검찰과 권력 핵심부를 상대로 정치적 빅딜을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정가 일각의 시각이다.
현대 비자금 사건에 대한 발본색원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검찰과 그 예봉을 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정 회장의 ‘진검승부’에 정치권과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