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든지 두고 보십쇼”
▲ 선동열 감독. | ||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신문들을 가리키는 선 감독의 입에선 푸념부터 흘러나왔다.
“이것 봐요. 야구 기사마다 제 얘기가 빠지질 않으니 이거 어디 민망해서 살겠나. 아직 뚜껑도 열어보지 않았는데 삼성이나 선동열 얘기가 연일 기사화되고 있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에요.”
선 감독이 수석코치로 첫선을 보인 지난해에도 그랬지만 올해는 또 다른 양상이다. 김응용 감독을 보좌하며 가급적 언행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당시와 지금은 역할과 반응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김응용 사장님이 감독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금 알겠어요.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이런 기분이 드니 정말 걱정되네. 감독은 감독인데 나이가 어린 감독이라 코치들 눈치 볼 때가 있어요. 특히 양일환 투수코치에게는 많이 미안하죠. 제가 투수 출신이다보니 자꾸 간섭할 때가 있거든. 미리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더라고.”
선 감독은 지금의 김응용 사장이 감독 시절 참으로 고독했을 거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코치들과 어울리고 싶어도 코치들이 어려워할까봐 일부러 자리를 피하게 돼요. 담배라도 같이 피우고 싶은데 대부분 선배들이라 함부로 담배를 꺼내들기가 그렇죠. 감독이 되니까 스스로 ‘왕따’가 되더라고요. 아직은 초짜라 그런지 조금 어색하고 덜 익숙하고 그러네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맞는 말이라고 한다. 코치 때랑, 감독이 된 지금이랑 선수들을 보는 시각과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내용이다. 코치 때는 선수들의 ‘큰형님’처럼 넉넉한 이해와 배려가 우선이었다면 감독은 인기 모드로만 선수단을 이끌어 나갈 수 없음을 강조했다.
선동열 감독은 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출사표로 ‘지키는 야구’를 천명했다. 경기 후반부 1점차로 리드하는 상황에서도 역전당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야구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많은 훈련과 연습게임을 통해 ‘지키는 야구’의 틀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시범경기를 통해서 드러난 삼성의 전력은 약점 투성이라며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현대에서 데려온 박진만이 손목 부상이라 걱정이에요. 권혁은 팔꿈치가 안 좋고요. 부상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전력에 공백이 생길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 삼성이 실력이 없어서 우승을 못한 게 아니거든요. 단기전에서 이길 수 있는 야구를 못했던 겁니다. 올해 삼성에선 뻥뻥 방망이만 휘둘러대는 야구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겁니다. 작전을 통해 오밀조밀한 야구를 할 거예요. 그걸 시험중인 거죠. 지금.”
▲ 선동열 삼성 감독은 올해 목표를 “당연히 우승”이라고 밝혔다. 오른쪽은 이순철 LG 감독.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FA선수 2명을 영입했다고 해서 삼성이 강팀이 됐다고들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가 않아요. 절대 엄살이 아닙니다. 삼성이라는 브랜드와 선동열이라는 이름 때문에 실제 ‘자산’보다 과대평가된 부분이 많은 거죠. 다른 팀은 우리가 부럽다고 하는데 난 시범경기 동안 다른 팀이 너무 부럽던데? 탐나는 선수들도 많고. 왜 우리 팀엔 저런 선수가 없지? 내가 능력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이 되니까 선수 욕심만 늘어나대요.”
선 감독은 괌 전지훈련 동안 선수들에게 몸가짐과 행동, 솔선수범, 희생, 실력, 멀티포지션, 목표, 정신무장 등 일곱 가지 당부사항을 제시하며 ‘야구는 게임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표출한 바 있다. 그만큼 감독 데뷔 첫 해를 맞는 선 감독의 의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김응용 사장님도 감독 시절 엄하기로 소문난 분이시잖아요. 난 더하면 더했지 그보다 못하진 않을 겁니다. 그걸 선수들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했어요. 젊은 감독의 장점도 살리겠지만 젊은 감독이라고 해서 말랑말랑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죠. 강압적인 것은 효과가 없어요. 선수들이 긴장감을 잃지 않고 매 순간 파이팅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제가 할 일이에요.”
선 감독은 공격 야구는 절대 선호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수비가 안 되는 선수라면 아무리 공격력이 훌륭해도 출전시키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선 감독한테는 스타플레이어의 이름보다 팀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선수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있는 내용이었다.
선수시절부터 스승과 제자로 질긴 인연을 잇고 있는 김응용 사장과의 해태시절 에피소드가 흘러 나왔다. 감독이 된 지금도 이전 선수시절 때의 일화는 아무리 곱씹어도 재미있는 추억이 되나보다. 선 감독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꽃이 피었다.
“93년인가 94년인가? 선발에서 마무리로 보직이 변경된 걸 억울해 하던 어느날 해태가 6점 차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감독님이 갑자기 저더러 나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순간 황당했죠. 주로 1~2점차의 점수일 때만 등판했기 때문에 더 반발심이 생겼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 경기 끝난 이후 밤에 감독님께 항의 전화를 드렸어요. 무척 열받으셨을 텐데 화를 안 내시더라고요. 아마 다른 선수였다면 ‘건방진 ×’ 어쩌구 저쩌구하며 엄청 뭐라고 하셨을 텐데요. 저도 올해 어떤 선수로부터 그런 전화 받을 지도 몰라요. 세상 참 재미있죠? 하하.”
선 감독은 지난 번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일본 주니치 시절 호시노 감독과의 끈끈한 정을 결코 잊지 못했다. 자신의 지도 스타일이 호시노 감독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밝힐 만큼 호시노 감독의 선이 굵은 지도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96년 주니치로 옮겨 간 첫 해에는 정말 선동열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만큼 수모를 많이 당했어요. ‘조센진’이라는 비아냥거림까지 감수해야 했으니까. 특히 호시노 감독님은 더 하셨죠. 잘하는 선수에게는 큰 사랑을 베풀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은 선수한테는 아주 매몰차게 대했거든요. 이듬해 동계훈련 동안 절치부심하며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었는데 스프링캠프도중 실시한 연습게임의 첫 번째 시합에 구원으로 처음 나가게 됐어요. 구위는 그 전보다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치로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를 안게 됐죠. ‘아, 올해도 안 되는 구나’하는 절망감이 엄습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절 계속해서 시합에 데리고 다니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이기고 있는 경기엔 모두 내보내주셨어요. 그 덕분에 연속 7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고 자신감을 회복했죠.”
▲ 김응용 감독(왼쪽), 호시노 감독 | ||
“호시노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신 분이에요. 투수 교체 타이밍이나 이기는 경기 운영 방법 등 주니치 시절 그분으로부터 배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번 일본 전지훈련 때 호시노 감독을 직접 뵌 적이 있는데 무척 흐뭇해 하시더라고요. ‘감독되니까 할 만 하냐’고 물으시면서.”
선 감독과 삼성에 대해 이런 저런 모양새로 ‘딴지 걸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순철 감독에 대해 라이벌 의식이 있는지를 물었다.
“친구 사이인데요 뭘. 자꾸 언론에서 그렇게 몰아가는 거잖아요.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서, 팬들의 흥미를 불러 모으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서 말하는 건 좀 그래요. 초보 감독이니까 다른 팀 감독님들의 충고는 달게 받겠지만 자꾸 뭔가를 건드리려는 발상은 안 된다고 생각해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선 감독은 주위의 견제가 심해질수록 선수들에게 강한 전투력을 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양준혁, 김한수 등 고참급 선수들도 조용훈, 조동찬에게 실력이 안 되면 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선 감독의 얘기를 듣고 있던 기자가 “그래도 고참들을 안고 가야지 선수단 팀워크가 더욱 단단해지지 않겠냐”는 객관적인 의견을 전하자, 선 감독은 “장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예전에 어떠했다는 프로필은 전쟁터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면서 성적 우선으로 주전들을 결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거듭 밝혔다.
삼성에는 올해 루더 해크먼과 마틴 바르가스라는 용병 투수들이 새로 가세했다. 그동안 삼성의 용병들은 말 많고 탈 많기로 유명했던 만큼 선 감독은 그런 전통 아닌 전통을 탈바꿈 시키기 위해 올해 뽑은 용병들을 시즌 끝날 때까지 끌고 간다는 원칙을 세웠다. 즉 실력이 떨어지면 자신이 직접 트레이닝 시켜서라도 중도 교체 없이 계속 ‘Go!’를 외치겠다는 것.
삼성과 감독 계약을 맺으면서 2억원의 연봉을 받은 선 감독. 이런 대우는 현대 수장인 김재박 감독의 2억5천만원, 바로 다음 서열이다. 프로야구 감독 중 2억원대의 연봉은 한화의 김인식 감독을 포함해 모두 3명. 초보 감독치고는 다소 ‘쎈’ 몸값을 챙긴 탓에 그만큼 부담이 크다.
“감독은 ‘천의 얼굴’을 갖고 있어야 되나 봐요. 연패를 당해도 겉으론 웃을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하는데 글쎄, 잘 될지 모르겠어요. ‘국보 투수’라는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타이틀 때문에 스트레스 팍팍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잘 하는지 두고 보자’라는 분들이 아주 많거든요. 그래도 전 잘 해 낼 겁니다. 웬만해선 삼성을 이기기 힘들다는 걸 꼭 보여줄 거예요. 목표요? 허허. 당연히 우승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