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생명체 맞서 인간의 ‘가오’ 보여준 사냥꾼 성기 역…“마음 꺾일 때마다 감독님이 용기 북돋아”

그가 이처럼 몸을 사리지 않은 건 장면 하나하나에 지독하리만치 집착하는 '나홍진 유니버스'에 들어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기자와 만난 배우 조인성(44)은 나 감독의 현장이 그만큼 배우에게도 온몸으로 부딪치는 몰입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숲속에서 말이 그렇게 빨리 뛸 수 없어요. 주변에 나무도 풀도 많은 데다, 한 번 속도가 붙으면 말이 그 위에 타고 있는 저를 배려해 주지 않거든요. 광개토대왕이었으면 거기서 빠르게 말을 몰 수 있겠지만, 조인성은 안 되니까요(웃음). 대본에 말 타는 게 있다고 해도 현장에 갔을 때 구현이 어렵다 싶으면 보통 다른 방법도 생각해 보지만 우리 감독님은 그러지 않으셨죠. 후반 액션 신을 촬영할 때 처음엔 안 될 것 같다 싶었는데 그때마다 감독님이 '꺾이지 마! 꺾이면 안 돼요, 할 수 있어!'라고 외쳐주시더라고요(웃음)."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분)이 동네 청년들로부터 호랑이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온 마을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믿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극 중 조인성은 자신의 무리와 함께 '호랑이'가 향했다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에게 쫓기게 되는 젊은 사냥꾼 성기를 연기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이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에 대한 전사가 영화 속에서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무리와의 관계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설명하고자 했다는 게 조인성의 이야기다.

숲속으로 들어간 성기는 무리를 전멸시킨 괴생명체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밴더 분)와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과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을 따라잡을 정도로 압도적인 움직임,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덤벼드는 낯선 괴물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총기도 통하지 않는 상대와 맞선 성기 역시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일 뿐이지만 다른 인물들이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동안에도 그는 끝까지 버텨내는 근성을 보인다. 이를 두고 "인간의 '가오'를 담당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나홍진 감독의 말에 조인성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의 뜻을 표했다.
"이게 어떻게 보면 남자들 세상 이야기이긴 한데요, 너무 무서운 존재를 만나면 아픈 것도 잊고 이상한 짓을 다 하게 되거든요. 이런 얘기도 있잖아요. 정말 강한 상대를 만나면 인간의 존엄성을 알리라는 말(웃음). 호랑이를 만나면 살 생각은 하지 말고 인간의 존엄성을 알리고 싸우다 죽으래요. 공작새가 자기 몸을 부풀리거나 원숭이가 털을 곤두세워서 크게 몸을 표현하는 것처럼요. 마베이요를 앞에 둔 성기의 행동이 바로 그 '가오'를 잡는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연기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굉장히 시원하더라고요. 내가 연기한 게 옳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니면 말고, 다시 해' 이런 식이었거든요. 첫 테이크에 오케이 받으려고 찍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현해 보고, 감독님이 극단으로 몰아치면 또 그 극단으로 같이 들어가고 그랬죠. 이렇게 저를 해체해 놓으면 연기할 때 제일 편하고 재미있어요. 처음 나홍진 감독님과 만났을 때 이 작품 안에서 저를 어떤 그림으로 보여주실지 정말 궁금했거든요. 그런 모습들은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감독님들이 저를 보고 '저런 것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하셔야만 할 수 있으니까요."
성기를 통해 보여준 겁먹고, 얻어맞고, 발악하는 얼굴은 앞서 다양한 액션과 로맨스 작품 속 조인성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연기한 장본인에게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선택이 아니었다. 1998년 CF 모델로 데뷔한 뒤 빠르게 스타 배우가 된 조인성은 오래전부터 '스타'라는 이름표가 정해 놓은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아왔다고 했다. 이번 현장에서 그가 선택한 '해체된 모습' 역시 스스로에게 오랫동안 요구해 온 배우로서의 태도 위에서 가능한 도전이었다.
"이제까지 제가 안정적인 작품만 해온 건 아니에요. 영화 '쌍화점'에는 동성애 연기까지 도전하며 스타라는 허울을 벗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제 젊은 시절이 담겨 있죠. 누군가는 그 스타라는 말을 충분히 즐겨도 된다고 하지만, 저는 '넌 (스타니까) 이런 거 못하잖아'라는 말이 너무 듣기 싫더라고요. 그땐 스타와 배우를 나누려 한 시기였거든요. 그 말에서 정말로 벗어나고 싶었고, '저 좀 봐주세요. 저는 배우입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런 젊은 시절과 그 속에서 겪었던 부침들을 통해 성기를 연기한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조인성은 오만방자하고 교만했을 테니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