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지고 TV 뜨고, 유니클로 지고 라이트온 뜨고…종잡을 수 없어요
도요타, 유니클로, 미쓰미전기 등 일본 유명기업들이 신형 불황의 덫에 걸렸다. 종잡을 수 없는 소비패턴 탓에 기존의 성공 방정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유니클로 홈페이지.
일본은 전체 GDP의 60%를 개인소비가 차지한다. 어쨌든 경제가 살아나려면 소비자가 지갑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 소비자들의 구매성향을 살펴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신상품에 열중했다가도 갑자기 또 다른 신상품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예상 밖의 구매행동은 기업의 생사와 직결되다보니, 경영진들의 속앓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 텔레비전을 기피하고 스마트폰에 열광했던 소비자들이 웬일인지 텔레비전으로 대거 돌아오고 있다. 과거 일본의 ‘간판산업’으로 꼽히던 텔레비전산업은 현재 ‘불황업종’의 대명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하지만 관련시장이 다시 꿈틀대며 부활하기 시작했다.
파나소닉의 한 간부는 “지난해부터 4K 고화질 TV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전했다. 한때 10만 원대의 저가형 TV를 팔아야 할 만큼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이제는 200만~300만 원대의 고가 제품이 잘 팔린다는 것이다. 그는 “리먼쇼크 이후 8년 만에 TV산업이 흑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대형 가전유통업체 야마다전기가 발표한 ‘2015년 4~12월기 결산’도 큰 관심을 집중시켰다.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2.4배 급증했기 때문이다. 결산자료에 따르면 “그 배경은 4K TV 수요증가에 따른 단가 상승으로, 결국 텔레비전 판매가 실적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부활의 흐름을 타고, TV에 연결해 사용하는 가정용게임기도 ‘V자형’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닌텐도의 Wii U 판매 호조는 주목할 만하다. 100만 장 이상 팔리는, 소위 ‘대박 게임’도 등장했다. 몇 년간 적자의 늪에 허덕이던 게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반면 ‘텔레비전 세력’을 곁눈질하며 침울한 분위기에 놓인 곳이 있다. 바로 스마트폰업계다. 상징적인 것은 애플사의 아이폰이 2008년 일본에 진출한 이후, 처음으로 출하대수가 전년을 밑돌았다는 점이다. 이에 교세라와 파낙 등 관련업체들은 이익 추정치를 하향 조정했다. 부품업체인 미쓰미전기, 호세덴의 경우 “3월 결산에서 적자가 예상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2월에는 업계의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사건’도 있었다. 스마트폰 게임업계에서 급성장을 구가하던 겅호온라인엔터테인먼트의 손태장(일본명 손 타이조) 회장이 일신상의 사정으로 갑자기 회장직을 퇴임한 것. 손태장 회장은 벤처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동생이라서, 이를 두고 “스마트폰업계가 침몰할 전조를 꿰뚫어 보고, 가라앉은 배에서 달아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했다.
분명 어제까지 폭발적으로 팔리던 상품수요가 순간 증발이라도 하듯 사라지고, 이번에는 전혀 다른 상품이 인기를 끈다. 하지만 그 역시 일시적으로 끝난다. 기업 측에서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현상이라 미처 준비도, 대응도 못하는 상황. 어쩌면 4K TV도 몇 달 후에는 붐이 끝나버려 재고누적이 쌓일지도 모를 일이다. 마냥 들떠있다가는 뒤통수를 맞기 십상. 이것이 바로 현 일본경제를 덮치고 있는 ‘소비 격변’ 현상이다.
호세이대학교 교수 나미키 유지 씨는 “일본인의 소비가 점점 편의점화 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편의점은 일본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쇼핑장소인데, 매주 쏟아지는 신상품만 무려 100개가량이다. 이렇듯 편의점식 소비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편의점이 주는 신선함은 다른 업계·서비스에도 영향을 미쳐, 각 업계마다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는 소비자의 구매패턴에 흔들리게 됐다”는 분석이다.
일례로 최근 의류업계에서 화제가 된 것은 브랜드 ‘라이트온’의 부활이다. 캐주얼웨어 전문점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라이트온은 신흥세력 ‘유니클로’에 고객을 빼앗겨 2010년 최초로 적자로 전락했다. 이후 계속 경영부진의 늪에 허덕였다. 하지만 최근 매출액이 13개월 연속 전년 대비 증가세를 보이며 크게 약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유니클로에 질린 소비자가 한꺼번에 라이트온으로 몰려갔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라이트온의 내점객 수가 늘어난 것에 반해, 유니클로는 전년 대비 감소하는 추세다.
자동차업계에서는 경차가 지난해 15% 이상 판매량이 급감해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업체 포드가 “올해 안에 일본 시장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자동차회사 마쓰다 역시 “미니밴 생산을 중단할 계획”이라는 사실이 보도되는 등 이대로 자동차업계도 부진의 늪에 빠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최고급차에 소비자들의 지갑이 열리고 있다. 이와 관련, 도요타 직원은 “유행할 차종을 예측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대응책이라고 한다면 강력한 후보 차종을 여러 대 ‘풀 라인업’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도요타가 다이하쓰를 완전 자회사화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밝혔다.
신상품을 개발해도 히트가 오래가지 않는다면, 당연히 기업의 이익은 줄게 된다. 다시 말해 소비자가 질리기 전에, 앞서 새로운 히트상품을 잇달아 선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 가계의 실질소비 지출 추이를 살펴보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2000년 이후 일본 가구당 소비는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특히 리먼쇼크나 동일본대지진 때보다 현재의 소비지출 하락폭이 더 크다. 경기회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소비가 여전히 부진한 양상이다. 결국은 품질만 좋아서는 팔리지 않는다. 신선함과 품질, 그에 합당한 가격을 갖춘 상품이어야만 소비자의 지갑이 열린다. 어느 때보다도 일본 기업은 힘겨운 상황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주간겐다이>에 따르면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는 기업 도산 건수가 4개월 연속 증가세”라고 한다. 줄어드는 파이를 놓고 싸우다보니 차례차례 쓰러지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 기업 수가 감소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상품의 선택사항이 줄어드는 것과 같기 때문에 더욱 물건을 사지 않게 된다. 이것이 다시 경기를 위축시키고, 또 다른 기업이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출구 없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나의 히트상품을 탄생시키고, 지속적으로 나오는 이익으로 다음 신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이제 기존의 승리 방정식은 통하지 않게 됐다. 상품의 수명이 짧아지면서 기업의 수명도 점점 짧아진다. <주간겐다이>는 이를 ‘신형불황’이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형불황에 빠진 일본기업들의 고민이 깊어만 가고 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