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위해 잠시 유턴 NBA 꼭 갑니다”
▲ 지난 22일 귀국한 방성윤. 눈은 여전히 NBA를 향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 쟤 고등학생 맞아?
2000년 여름 미국 하와이. 대학 최강 연세대의 하와이 전지훈련이 한창이던 브리검영 대학교 체육관에 다른 선수들보다 앳된 얼굴을 한 선수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연세대의 파란색 유니폼이 너무 입고 싶었다”고 말했던 휘문고 3학년생 방성윤이었다.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에서 연세대행(行)을 일찌감치 선택한 방성윤이 고3 여름방학을 이용해 연세대의 하와이 전지훈련에 동참한 것. 연세대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브리검영 대학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마다 입학이 확정된 고교졸업 예정자들을 동행하곤 한다.
그러나 방성윤은 여느 ‘신입생’들과 달랐다. 거의 주전 자리를 꿰차고 연습경기에 나섰다. 당시 연세대 코치를 맡고 있었던 김남수씨는 “자신보다 훨씬 몸집이 큰 흑인 선수들과의 맞대결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라고 회상한다.
# 부산아시안게임서 훨훨~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2001년 방성윤은 무릎과 발등 부상으로 1년여를 허송하고 만다.
김남수 당시 연세대 코치는 “당시 방성윤은 NBA에 갈 수 있다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성윤의 재활을 담당했던 의사가 ‘NBA에서도 통할 수 있는 신체조건’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본인도 크게 고무됐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2002년 9월, 방성윤은 서장훈 이상민 문경은 김주성 김승현 등 최고의 농구 스타들과 함께 국가대표로 뽑혀 부산아시안게임에 나선다. 외곽포를 펑펑 날려대던 방성윤은 중국과의 결승전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에 한몫한다. 우승의 혜택으로 돌아온 것은 병역 면제. NBA를 향한 방성윤의 꿈이 구체화하는 순간이었다.
# 미국 땅을 밟다
2003년 6월이었다. 당시 연세대의 사령탑을 맡고 있던 김남기 감독은 방성윤을 LA롱비치 농구캠프로 보내 실력을 테스트할 기회를 준다. 방성윤은 동양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조건을 지닌 흑인 선수들과 정면대결을 하고 가능성을 확인한 뒤 연세대로 돌아온다.
이듬해 방성윤이 졸업반이 되자 다국적 스포츠마케팅그룹 IMG코리아에서 정식 제안을 해온다. 당시 방성윤의 지도를 맡고 있던 김남기 감독의 대답은 ‘노’(No).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방성윤을 아무 것도 확실치 않은 미국 무대에 내보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방성윤은 그해 4월에 있었던 MBC배 대학농구에서 소속팀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며 ‘미국에 보내달라’는 무력시위를 펼친다. 김 감독은 “본인의 뜻이 워낙 확고했다. 결국 이재민 대한농구협회 국제이사와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2주 동안 뉴욕 캠프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는데, 이후에 시카고와 플로리다의 IMG 캠프로 옮겨서 수많은 농구 유망주들과 경쟁을 펼치며 본토 농구를 익혀나가더라”고 말했다.
ABA리그에서 활약하던 지난해 여름, 방성윤의 고독한 노력은 마침내 빛을 발한다. NBDL리그의 로어노크 대즐이 11월 열리는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온 것이다.
플로리다 IMG아카데미에서 마음껏 뽐냈던 방성윤의 정확한 외곽슛은 로어노크 관계자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방성윤은 NBA 하부리그인 NBDL 드래프트를 일주일여 앞둔 2004년 10월30일 부푼 꿈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싣는다.
2004년 11월6일, 방성윤은 4라운드 2번으로 로어노크 대즐에 지명되고 NBA를 향한 자신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한국 선수가 미국에 입성한 것은 NBA 포틀랜드 소속의 하승진(20·223㎝)에 이어 두 번째였다.
# 장애물이 된 신인드래프트
방성윤의 미국 생활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10시간이 넘게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이동하고, 매 끼니를 햄버거로 때우는 생활도 견뎌야 했다. 주당 5백달러(약 50만원) 정도 나오는 급여로 자신의 용돈과 동생 뒷바라지까지 했다.
모든 시련을 참고 견디며 한창 NBA를 향한 꿈을 키워가고 있던 방성윤에게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 다가왔다. 2005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한국농구연맹(KBL)이 규약 제89조를 엄격하게 적용시켜 “대학졸업예정자는 원칙적으로 모두 드래프트 대상자다. 방성윤을 예외로 해줄 수 없다. 방성윤이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고도 계약을 거부하면 규정상 향후 5년간 한국무대에서 뛸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 결국 방성윤은 올 2월2일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부산 KTF에 지명됐다.
# 지루한 싸움의 시작
“2년 동안 NBA 도전을 위한 모든 노력을 적극 지원하겠다.” 한국 농구의 차세대 에이스를 뽑아가며 KTF가 내건 약속은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NBA에 가기 전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방성윤과 하루라도 빨리 그가 팀에 합류하기를 바랐던 KTF, 여기에 방성윤을 통해 한 푼의 이익이라도 더 챙겨보려 했던 IMG의 관계는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계약과정에서 ‘70억원 요구설’까지 터지면서 KTF와 방성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든든한 후원자’ 약속한 SK
올 시즌 NBDL리그가 NBA의 2군격인 ‘D(Development)-리그’에 편입되면서 방성윤의 NBA행은 다소 어려워졌다. 여기에 KTF와의 불화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다른 팀들의 물밑 접촉이 줄을 이었다.
집안 형편도 방성윤의 가슴 한구석을 짓눌렀다. KTF에서 받은 3년 계약 선급금(2억7천만원의 절반인 1억3천5백만원)으로 급한 불을 끄긴 했지만, 석공(石工)으로 일하는 아버지 방대식씨의 수입에만 의지하는 집안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진정한 기량 발전을 꾀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시즌만 활약하고 비시즌 때는 다시 미국으로 가 NBA에 트라이해 보자’는 SK측의 제안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결국 방성윤은 결심했다. 홀로 타향살이를 하며 열악한 환경에서 NBA에 도전하기보다는 든든한 후원자 역할이 절실히 필요했다. 방성윤은 말한다. “아직도 NBA에 진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가득 차 있다. NBDL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면서 흑인 선수들과 경쟁했던 것이 괜한 게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SK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를 휘저을 방성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선 NBA를 향한 깊은 꿈이 아직도 자라나고 있다.
허재원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