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투자사 계좌 거쳐…절대 못 턴다”
한때 사채시장 중심지로 각광을 받은 명동 전경.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지난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로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던 명동 사채시장은 오히려 각광을 받았다. 실체를 밝힐 수 없는 검은 돈이 명동으로 더 많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명동을 활용해 비자금을 운용했던 정치인들도 적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사채시장 지형에도 변화가 생겼다. 명동에 집중돼 있던 돈이 차츰 강남 지역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강남 일대는 벤처기업 열풍으로 막대한 자금이 유통됐고, 명동 사채업자들은 이를 계기로 강남에까지 진출했다.
당시 벤처 회사를 창업한 사업가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만져봤다. 매일 밤 호화 술 파티를 벌였다. 그러다 보니 은행보다는 사채를 자주 이용하게 됐다. 처음 명동에 있던 업자들이 강남과 역삼 일대에 사무실을 차리고 사채업을 했다”고 떠올렸다.
그런데 얼마 전 강남에서 사채업 등을 하는 C 씨는 기자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놨다. 정치권으로부터 흘러들어온 100억 원 중 일부를 차명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C 씨는 명동에서 사채를 시작해 지금은 부동산 및 기업 인수·합병(M&A) 등에 투자하는 수백억대 자산가다. 다른 말로 하면 이른바 ‘전주’인 셈이다. 구체적인 사연은 이렇다.
“명동에서 사채업을 하는 형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100억 원가량의 무기명 채권을 세탁해 현금으로 만들어 보관해달라는 것이었다. 채권 소유주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돈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돈을 돌리는 것 아니겠느냐. 요즘 들어선 드물긴 하지만 가끔 이런 요구를 받은 적이 있다.”
보통 사채업자들끼리는 긴밀한 라인이 구축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을 공동으로 투자·관리하는 일도 빈번하다. 과거엔 전주 한 명이 수십 명의 전주를 고용하는 피라미드 형식으로도 운영되기도 했다. C 씨 역시 부탁받은 100억 원 중 절반가량은 다른 사채업자에게 넘기고 나머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처리했다고 한다. 다른 사채업자 K 씨는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거물급 업자가 아니고서는 100억 원이 넘는 돈을 개인이 처리하긴 부담이 있다. 그래서 보통 팀을 이루거나 다른 업자들과 함께 작업을 한다. 비밀 유지는 기본이다. 이 룰을 깨면 이 바닥에서 퇴출된다. 사채시장은 곤란한 돈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그때마다 어떤 돈인지 캐고 다닐 수는 없지 않느냐. 그냥 우리는 수수료를 받고 업무를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일은 우리가 전문가다. 솔직히 마음먹고 돈을 돌리면 그 어떤 수사기관도 추적할 수 없을 것이다.”
C 씨가 털어놓은 돈 세탁 방법은 이렇다. K 씨뿐 아니라 <일요신문>이 취재과정에서 접촉한 사채업자들도 이러한 방법을 흔히들 사용한다고 했다.
“일단 의뢰받은 채권 등을 일차적으로 현금화한다. 때론 은행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보통 보유하고 있는 현금으로 채우기도 한다. 그 다음은 돈을 해외로 송금한다. 조세회피지역을 애용한다. 조세회피지역 두 군데 정도를 돌린 뒤, 싱가포르 또는 홍콩 등에 위치한 다국적 투자회사로 입금한다. 그 다음 다시 조세회피지역을 거쳐 한국 또는 외국에 차명계좌를 만들어 보관한다.”
C 씨의 설명이 계속된다.
“복잡할 것 같지만 여러 번 해보면 간단하다. 특히 안전하다. 그래서 재벌이나 정치권 등 유력 인사들도 이런 방법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검찰이나 금융당국이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세회피지역까지는 어떻게 가더라도 다국적 투자회사 계좌는 어떻게 털 것이냐. 이런 식으로 해서 해외로 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돈이 엄청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돈을 세탁하는 사채업자들이 제법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C 씨는 100억 원의 출처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을 들었다. 유력 정치인이 맡겨놓은 비자금이라는 것이었다. 채권을 명동으로 가지고 왔던 충남 지역 사업가 L 씨 역시 해당 정치인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L 씨는 기자에게 “돈을 사채시장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누구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여러 번 연락을 취했지만 L 씨와는 더 이상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C 씨는 “과거엔 정치권에서 흘러들어온 돈을 세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전직 대통령 일가도 이렇게 해서 도마에 오르지 않았느냐. 여러 번 사법당국 조사를 받은 후 많이 줄긴 했지만 간혹 있다. 이번 건 역시 비슷한 경우다. 지금 거론되는 인사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경험상 정치권 돈인 것은 100% 맞다.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들었다. 현재 세탁을 거친 돈을 여러 개의 계좌로 쪼개 보관 중”이라면서 “사채시장 세탁 방법도 워낙 정교해져서 수사기관이 눈치를 채더라도 돈이 꼬리를 밟힐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런 점에서 아마 또 다른 정치권의 검은 돈이 공공연히 관리되고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