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도전’?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지난 11월23일 미국 프로야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리그 입단계약을 맺은 최향남을 29일 만났다. 이번 계약은 10여 년간 메이저리그를 향한 그의 집요한 ‘애정’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15년 야구인생의 최고 화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 야구 도전’을 수많은 사연과 실패 끝에 이뤄낸 최향남을 지난 11월29일 송파구 방이동 집 근처에서 만나 그 ‘풀 스토리’를 들어봤다.
#꼬이기 시작한 야구인생
최향남은 목포 영흥고 출신이다. 야구부에서 대학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현실에서 서울의 동국대가 최향남을 특기자로 입학시키겠다고 나섰다. ‘가문의 영광’이자 ‘지역민들의 최대 경사’였다.
최향남은 졸업하기 전부터 동국대 야구부에 들어가 예비 신입생 특별 훈련을 받았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동국대 입학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최향남의 입학원서를 담당한 교련 선생이 원서를 접수시키면서 그만 특기자 원서를 첨부하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 대학 담당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안 최향남은 뒤늦게 특기자 원서를 첨부하려 했지만 학교 교칙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동국대 입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그 교련 선생님이 미안하다면서 가방을 선물해 주셨지만 그 가방과 대학 입학과는 바꿀 수 없는 거 아닌가.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짧았지만 한달 동안 맛본 캠퍼스 생활은 최향남에게 진한 추억과 미련을 안겨주었다. 특히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었던 채시라, 김혜수를 직접 본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최향남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두 여자 연예인이 ‘너무 예뻤다’고 거듭 되풀이했다.
#반액 할인 입단
해태는 목포에서 유망한 투수로 손꼽힌 최향남에게 이미 ‘러브콜’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최향남이 거절했다. 대학 입학이 약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해태의 처음 제시액은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천2백만원. 그러나 대학 진학이 물거품 된 후 최향남이 머리 숙이고 찾아가자 몸값이 반으로 깎였다. 어영부영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 최향남. 이번엔 또 다른 ‘벽’이 존재했다. 어느 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해태의 팀 분위기였다.
“층층시하에서 참 많이 힘들고 고달팠다. 특히 내 ‘방장’이었던 한 선배의 괴롭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선배가 술 먹고 들어올 때 내가 자고 있으면 바로 ‘실력행사’에 들어간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을 정도였다. 왜 그토록 날 미워하고 짓밟으려 했는지 지금도 궁금할 따름이다.”
최향남이 해태에 입단할 때만 해도 당시 김응용 감독(현 삼성 라이온즈 사장)은 최향남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자들을 상대로 최향남 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최향남은 91년 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피성 군 입대를 했고, 94년 제대 후에도 제 모습을 찾지 못하자 김 감독은 선수들 앞에서 최향남에게 야구를 그만두라며 크게 질책하기까지 했다.
“90년 어깨 부상으로 고생을 많이 하면서 감독님께 실망만 안겨드렸다. 감독님은 나한테 10승 이상 올릴 수 있는 선수라며 잔뜩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런 선수가 불펜에선 눈 돌아가는 볼을 마구 뿌려대다가 마운드에만 올라가면 한없이 쪼그라드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셨겠나. 그래서 그때 생긴 별명이 ‘불펜 선동열’이었다.”
해태에서 7년 동안 거둔 성적은 1승6패. 1군보다는 2군에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최향남의 마음이 이미 해태를 떠났다는 사실. 최향남은 당시 어떻게 하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다고 토로했다.
“그동안 트레이드된 선수들의 면면을 관찰했다. 공통점은 대부분 팀에서 ‘문제아’였다는 사실이다. 즉 팀에 고분고분해선 트레이드되기가 힘들었다. 장고 끝에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 ‘사표’를 제출했다. 야구를 그만두고 싶으니 사표를 받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쓴 선수는 최향남이 최초일 것이다. 사표를 받은 해태 입장에선 황담함의 극치를 느꼈지만 그냥 버리자니 최향남이란 카드가 너무 아까웠다. 결국 트레이드시키기로 방침을 정하고 조용히 물밑에서 팀을 알아봤는데 LG에서 최훈재랑 맞트레이드를 원해 최향남은 LG로 이적하게 된다.
“LG로 트레이드된 걸 뉴스를 통해 알았다. 처음엔 믿겨지지 않았다. LG는 내가 가장 가고 싶은 팀이었기 때문에 꿈인가 생시인가 할 지경이었다. 속으로 만세 삼창을 불렀다. 곧장 짐을 싸서 진주에서 훈련중인 LG를 찾았는데 당시 천보성 감독이 다가와선 ‘잘해보자’며 악수를 청하더라. 와! 이거구나 싶었다. 감독이 선수한테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민 게 너무 신기했다. LG의 그런 자유스런 분위기에 금세 흠뻑 취해 버렸다.”
#잊지 못할 ‘아파치 사건’
해태에서 1승밖에 올리지 못한 최향남은 LG로 이적한 첫 해에 8승, 그 다음 해인 98년 12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LG에서 한창 에이스로 활약하던 1998년 최향남은 가운데 머리만 샛노랗게 물들인 일명 ‘아파치 머리’를 하고 나타나 선수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코칭스태프에선 당장 염색한 머리를 바꾸라며 강도 높은 반응을 나타냈는데 일은 다음날 더 크게 터졌다. 선발 예정된 최향남이 염색을 빼기는커녕 오히려 머리 전체를 노랗게 물들이고 등장했던 것. 천보성 감독은 최향남의 행동을 항명으로 받아들이고 선발 예고된 최향남을 다른 투수로 교체하는 강수를 쓰기까지 했다. 최향남이 처음 털어놓는다는 당시의 상황을 들어봤다.
“한창 머리 염색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전승남과 손혁,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서 미장원에 염색을 하러 갔다. 먼저 전승남과 손혁이 염색을 했는데 색깔이 굉장히 옅게 나왔다. 그래서 내가 이번엔 진하게 해보자고 했고 담당자와 상의 끝에 머리 가운데에 노랗게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다. 코치님이 염색을 바꾸라고 하셔서 그 길로 미장원에 가 머리 전체를 염색했다. 반항이 절대 아니었다. 가운데만 노랗게 염색한 게 문제가 된 것 같아 통째로 노랗게 한 것뿐이었다.”
#골프에도 도전?
최향남은 94년 군 제대 후 하와이 교육리그에 참가했다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로부터 테스트 제의를 받게 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는 죽었다 깨도 불가능한 일로만 여겼는데 MLB 스카우트가 최향남의 투구폼을 직접 본 뒤 ‘은밀한 유혹’을 던진 것.
▲ 올 7월5일 기아 타이거즈의 마무리로 나와 역투하는 최향남. 스포츠서울 | ||
천보성-이광은 감독에서 2001년 김성근 감독으로 사령탑이 바뀐 뒤 최향남은 LG 사무실을 찾아가 야구를 그만두고 골프 선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김성근 감독의 만류로 1년 더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다 구단에서 최향남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2003년 10월 방출시켰는데 11월 최향남은 비밀리에 미국 애틀랜타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앞에서 테스트를 받고 조용히 귀국했다.
#남몰래 미국 가서 테스트
“미국에선 한국의 방출 선수한테 눈길을 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구위도 썩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방출 신세로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그때 마침 기아로부터 입단 제의가 왔다. 그러나 난 또 다시 9년 계약에 묶이기가 싫어 조건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연봉은 많이 안 줘도 되니까 해외에서 콜이 올 경우 무조건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 2004년 다시 기아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최향남은 올 2월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구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털어 미국 LA에서 진행된 공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당시 에이전트가 구대성과의 계약 문제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에이전트 조동윤씨(미국명 더글러스 조). 그로부터 ‘계약이 성사될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믿고 3개월간 미국의 여기저기를 떠돌며 귀국을 미루고 있었다. 결과는 이번에도 ‘꽝’이었다.
또다시 귀국 후 기아로 돌아간 최향남은 시즌을 마치고 지난 10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측으로부터 입단 테스트를 제의받자마자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왕복경비까지 모두 구단에서 제공해준다는 조건이라 안 갈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테스트를 마치고 최향남은 코칭스태프들의 반응이 이전과는 크게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크게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던 것. 지난 11월23일 서울 잠실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스카우트인 이승준씨와 연봉 10만달러에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기까지 최향남은 하루 하루 ‘널뛰는’ 심정으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계약 사실이 알려지면서 축하 전화를 많이 받았다. 나한테 ‘독한 놈’이라는 선배도 있었다. 지금도 몇몇 사람들은 내 행동을 두고 너무 무모한 도전 아니냐며 걱정한다. 그러나 난 내 인생을 가고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아보고 싶어 별 짓을 다했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이제부턴 메이저리그에 올라가기 위해서 또 다시 ‘별짓’을 해야 한다.”
최향남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배’들 중 박찬호, 서재응보다는 구대성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자기보다 더 많은 나이에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은 ‘풍운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향남은 기자한테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명언을 남겼다. 그토록 소원했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한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최향남은 2월 말 플로리다주 윈터 헤이븐에서 열리는 팀의 스프링캠프에 참가하면서 또 다시 ‘도전의 역사’를 쓰게 된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