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소녀의 ‘눈물’ 꼭 내보내야 했나
2014년 6월, 호주의 ‘채널 9’에서 방송된 <더 보이스 키즈 오스트레일리아>의 참가자 중엔 로미라는 소녀가 있었다. 12세의 로미는 통통한 얼굴에 긴 갈색 머리를 지닌 귀여운 아이였다. 심사위원은 여성 가수인 델타 굿렘과 멜라니 B, 그리고 남성 듀오인 매든 브라더스였다. 방식은 <더 보이스>와 동일했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심사위원들은 참가자의 노래를 듣다가 마음에 들면 ‘턴’을 하고, ‘턴’을 받고 예선을 통과한 참가자는 심사위원의 팀에 속해서 경쟁하게 된다.
예선에서 탈락된 후 눈물을 쏟는 로미. <더 보이스 키즈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화면 캡처.
조용히 무대에 오른 로미는 아델의 ‘터닝 테이블’(Turning Table)을 불렀다. 초반엔 다소 떨었지만 점점 안정을 찾아갔고, 관객들의 호응이 시작되었다. 12세 아이의 목소리 치곤 깊은 울림이 있었고, 델타 굿렘과 멜라니 B의 손가락은 버튼 위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확신하기엔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모양이었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아버지 리처드와 엄마 리자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결국 아무도 턴을 하지 않은 채 노래는 끝났다. 이때 로미는 갑자가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기 시작했고, 울음은 오열로 바뀌었다. 네 명의 심사위원들은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가 아이를 다독였지만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선택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소녀에게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 제작진은 큰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비난이 쏟아졌다. 같은 ‘채널 9’에서 방송됨에도 불구하고, 아침 프로그램 <투데이 쇼>의 진행자인 칼 스테파노비치는 “나는 TV에서 아이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며 “그런 모습이 호주 전역에 방송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본격적인 논쟁은 심리학자인 닥터 마이클 카-그렉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동과 청소년 심리 전문으로 유명한 의사이며, 특히 아이들의 정신적 행복에 대해 열 권 정도의 책을 냈던 카-그렉은 ‘채널 9’를 강하게 비판했다. 생방송이 아닌 상황에서 아이가 오열하는 장면을 방송한 건 제작진의 무지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심리적으로 붕괴되는 순간을 지상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건 일종의 폭력이라는 거다.
그의 주장엔 일리가 있었다. 오디션 당시 호주 전역에서 80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도전했고, 로미처럼 블라인드 오디션에 올라갈 수 있었던 아이들은 98명이었으며, 이들 중에 일부만 ‘턴’을 받아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98명의 블라인드 오디션 과정에서 굳이 탈락자인 로미를 방송에 내보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당한 방송 분량을 할애한 건, 특히 그 어떤 편집도 없이 내보낸 건, 로미의 노래보다는 눈물 때문이었다. 이것은 아이의 불안한 감정을 이용한 선정주의이며 일종의 범죄라는 것이 카-그렉 박사의 말이었다.
로미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심사위원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가 아이를 다독이고 있는 모습. <더 보이스 키즈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화면 캡처.
제작진에겐 참가자의 심리적 행복감보다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더 중요했을 것”이라는 박사의 이야기에 프로덕션인 ‘샤인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자는 참가하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위해 심리 치료사를 고용했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카-그렉 박사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아이나 부모의 요청이 있을 때 상담사를 붙여주는 식의 방법으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방송 같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어린 아이가 거절당했을 때 겪게 될 심리적 영향을 고려해야 하며, 로미는 이후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아무도 턴을 하지 않은 아이’로 통하게 될 거라며 그 책임을 물었다. 그러면서 아이를 떨어트린 심사위원들이 우루루 몰려가 위로하는 건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며, 그 모습마저 전국으로 방송망을 탄 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뉘앙스를 준다고 비판했다.
카-그렉 박사의 지적은 계속되었다. 그는 성인 참가자들조차 오디션 탈락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최소한 15세는 되어야 오디션에 나올 멘털이 형성된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로미의 부모는 오디션에 나간 건 100퍼센트 아이의 의사였고, 만약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면 로미가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아이가 이겨낼 거라고 생각했으며, 여전히 자신의 아이가 자랑스럽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무대에서 충격을 받았지만 이후 로미는 1년 뒤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더 보이스 키즈 오스트레일리아>는 2015년에 열리지 않았고, 대신 ‘채널 9’의 시사 프로그램인 <어 커렌트 어페어>에서 1년 만에 다시 로미를 찾았다. 여기서 로미는 “지금은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며 “자신에겐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이 있기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로미의 엄마는 1년 전을 회고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를 전국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내 아이의 목소리가 아름답다는 걸 알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진 알 수 없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