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쪽은 기업…사모펀드가 주도권 쥐고 ‘딜’
구조조정 과정을 혹독하게 거친 한 대기업 임원의 말이다. 이 임원의 말은 M&A 시장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사모펀드와 금융자본의 속성도 더욱 확연해진다. M&A가 무산되거나 시장 예상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지난해 무산된 동부익스프레스 매각, 최근 시장 예상가보다 2000억 원가량 낮은 가격에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평가받는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사업부 매각의 중심에는 사모펀드가 자리잡고 있다.
동부익스프레스 매각 주체는 KTB PE며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사업부 인수 주체는 MBK파트너스다. 다시 말해 동부익스프레스 매각이 무산된 이유 중에는 대주주인 사모펀드의 어떻게든 비싸게 팔려는 방침이 있었고,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사업부의 매각 가격이 예상보다 낮았던 까닭은 어떻게든 싸게 사려는 사모펀드의 ‘협상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9월 동부익스프레스 인수전에 단독입찰 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두 달여 실사를 거친 후 지난해 11월 전격적으로 인수를 포기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실사 후 생각보다 기업 가치가 크지 않아 KTB PE에 가격 조정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해 인수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의 입찰 가격은 4700억 원대로 알려져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진통 끝에 지난 3월 공작기계사업부를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에 1조 1000억 원가량에 매각했다. 하지만 당초 바라던 1조 3000억 원가량에 못 미치는 액수다.
지난해 말에는 MBK파트너스가 대주주로 있는 코웨이 매각이 무산되기도 했다. 한 대기업 고위 인사는 “급한 쪽은 기업이고 사모펀드는 느긋하다”며 “딜은 급한 쪽이 불리하고 느긋한 쪽이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유가 없는 기업 입장에서는 사모펀드에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그나마 사모펀드가 가장 합리적으로 자금을 운용하고 수익을 배분한다”며 “저금리 시대에 사모펀드의 제안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기업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