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유승민계 ‘공천 학살’ 막전 막후…김무성은 실리 얻고 신뢰 잃어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왼쪽)과 유승민 의원.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여론조사에서 1위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다는 한 새누리당 초선 의원은 자신의 컷오프 사실이 발표된 며칠 뒤 이런 말을 들려줬다. 하루이틀쯤 지나면 마음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란다.
오히려 기자들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에게 “컷오프의 이유가 뭔가”라고 물었을 때 “그걸 가르쳐주면 그 사람들 묵사발된다”고 답하면서 무슨 큰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돼버렸다고도 했다. 그는 “유승민 전 원대(원내대표를 그리 불렀다)의 공천이 새누리당의 민낯을 알려줄 것이다. 국민은 그것을 보고 판단하겠지”라고 했다.
지난 15일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이 대부분 ‘학살’된 7차 공천 발표를 유 의원은 대구 동구 자택에서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동지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일일이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몇 시간이 지난 새벽, 유 의원은 자택 앞에 일명 ‘뻗치기’를 하던 기자들을 피해 집을 나섰고 은둔에 들어갔다. 보좌진이나 측근그룹조차 “대표님(유승민 의원)께서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어디신지 묻기가 조심스럽다. 지금은 외로우셔도 혼자 계시고 싶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려줬다.
단수 공천인지, 경선인지, 컷오프인지를 두고 미적거리는 당 지도부와 공천관리위의 속내는 이한구 위원장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유승민 스스로 결단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공천관리위는 지금까지 그 결단을 기다리고 있는데 유 의원도 그 정도 되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공천관리위가 결단하겠다.”
<조선일보>를 통해 이 위원장의 표현이 실체를 드러낸 이날 유 의원과 친유승민계 의원들은 <한국일보>를 통해 “자진 탈당은 없다. 경선을 한다면 받아들이고 컷오프시킨다면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응수했다. 공은 다시 공천관리위로 넘어간 셈이다.
유 의원의 컷오프는 예고됐고 또 사실상 공천관리위에서 의결 수준으로 일치를 봤다고 전해진다. 지난 14일 공천관리위 회의에서는 일부 위원들이 컷오프의 역풍을 심각하게 분석해보자며 반대했지만 다음 날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됐다고 한다. 공천관리위에 ‘촉’을 드리웠던 정치권 관계자들 사이에선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일종의 작업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흐름이 달라질 수 없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공천관리위의 최종 발표는 유 의원을 뺀 나머지 친유승민계의 전원 컷오프였다. 정치권 한 인사는 “‘자, 니 수족을 우리가 다 잘랐다. 이제 네 생명은 네가 결정해라’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며 “유 의원이 며칠을 버티니 이 위원장도 매체 인터뷰로 마지막 경고를 날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16일 제20대 총선 공천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한편 이번 공천 과정을 들여다보면 친박계 내부도 ‘서열’이 재정비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 의원의 생존 여부에 언론의 조명이 쏠려 있어 부각되진 않았지만 컷오프된 친박계 중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가까운 원로그룹 다수가 포진해 있다.
친박계 1호 컷오프 대상인 김태환 의원, 장애인우선추천지역이 된 서상기 의원, 공천배제된 안홍준 의원은 지난 2014년 12월 청와대 비밀만찬의 당사자들이었던 ‘7인회’ 멤버들이다. 7인회는 컷오프된 앞의 세 의원과 서청원 최경환 정우택 유기준 의원이었다.
김태환 의원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서상기 안홍준 의원은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이한구 위원장은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이들에게 “당이 공천을 안 주면 탈당할 사람들을 우리가 잘 본 것”이라고 겨눴다.
김 의원은 사석에서 “내가 컷오프 1호가 됐는데 사실 그 전에 한마디 언질이라도 줬다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이, 그리고 우리 편(친박계)이 모욕감을 줬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시대를 풍미했던 ‘허주(빈 배)’ 고 김윤환 의원(5선)의 동생이다.
이에 다소 힘이 빠진 올드보이를 쳐내면서 원유철 원내대표, 윤상현 김재원 의원 등이 포함된 ‘신7인회’가 새로 결성될 것이란 말이 돌고 있다. 이번 ‘학살극’을 통해 서청원 최고위원의 국회의장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당대표설이 실제 일어날 일임을 암시했다는 것이 정가의 분석이다. 그 뒤를 젊은(?) 친박이 받쳐줄 것이란 얘기다.
“김무성 죽여버려, 솎아내”라는 취중 녹취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낙천된 윤 의원을 두고 새누리당이 무소속 출마를 용인하고 그 지역에 새누리당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란 말이 도는 것도 윤 의원의 파워가 업그레이드됐음을 증명하고 있다. 친박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지금의 공천 과정을 봤을 때 그 이야기가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한구가 쓴 잔혹사’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유승민 의원 다음으로 김무성 대표를 꼽는다. 김 대표는 수족들이 100% 생존했다는 실리를 얻었지만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상처를 입었다.
김 대표의 핵심 측근인 김학용 비서실장과 김성태 의원은 공천 막바지에 생환했고, 권성동 심윤조 김종훈 이진복 박민식 의원 등 친김무성계는 대부분 단수추천되거나 경선에 붙여져 생존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들의 지역구에서는 “현역들은 모두 김 대표에게 절이라도 올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차기 대권주자로서는 이미지를 구겼다. 20대 국회가 진박 의원들로 채워질 조짐이어서 당내 세력을 잃은 데다 윤 의원의 막말 파동과 이 위원장의 ‘맞짱’으로 김 대표는 실질 당내 세력분포에서 크게 밀려났다.
게다가 1년을 이야기한 ‘상향식 공천’이 막판 공천관리위에서 ‘하향식’으로 둔갑하면서 “과연 김무성을 믿을 수 있느냐”는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해 초 ‘K(김무성)-Y(유승민)라인’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던 한 청와대 행정관의 말이 1년 뒤 현실화하고 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