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과실 입증 모두 환자 몫, 재판 가도 검증은 게 편인 가재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하루아침에 아이를 잃고도 앉아서 의학 서적을 뒤져가며 공부해야 했다. 다른 식구 생각하면 직장도 그만 둘 수 없었고…” 지유 아버지 서동균 씨(40)가 깊은 한숨과 함께 털어놓은 말이다.
그런데 서 씨는 이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는 “당시 마취 전문의가 아닌 간호조무사가 전신마취를 했다는 걸 지유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알게 됐다. 진료차트에 적혀있어야 할 수술 당시의 약물 투여량, 의사의 지시사항 등도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병원 측은 “단순 실수”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서 씨가 의무기록과 수술기록 등을 확보하고,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의료 전문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증거를 찾고 병원 측 과실을 입증하는 일은 서 씨의 몫이었다. 전문 용어를 일일이 찾아봐야 했고, 영문으로 된 의료 기록들을 모두 번역해야 했다.
서 씨는 “지인들과 전문 변호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한계는 명백했다. 수사기관이 대한의사협회 등에 의무기록 감정을 맡겨도 ‘그럴 수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포괄적이고 모호한 결과만 나왔다“라며 ”이 내용에 대해 또 다시 공부하고 입증해야 하고… 병원 측 과실을 입증하는 데 있어 환자 측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고 말했다.
서 씨의 주장은 지난해 1심에서 ‘일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병원 측은 즉각 항소했고, 최근 2심이 진행 중이다. 이번엔 병원 측이 의료사고에 대비해 가입한 대형 보험사 소속 변호사들이 나섰다.
예강(여·당시 9세)이 부모의 사정도 서 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강이는 2014년 1월, 병원을 찾기 얼마 전 갑자기 코피를 쏟았고, 사고 당일 어지럼증을 호소해 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최윤주 씨(40)는 “1년 차 레지던트 2명이 요추천자 시술(신경계통 질환 진단을 위해 척수액을 얻으려 허리뼈 사이에 긴 바늘을 넣는 것)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그 과정에 저혈량성 쇼크가 왔다”며 병원 측의 과실을 주장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정상적인 뇌수막염 검사의 일환이었다. 의료과실은 없다”며 “법대로 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대로 하라”던 병원 측의 협조는 없었다. 최 씨가 당시 예강이 상태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병원 측에 관련 기록 등을 발급해 줄 것을 요구하자, 병원 측은 “진단서를 먼저 떼와라” “의사를 만나봐야 한다”는 등 절차가 있다며 차일피일 미뤘다.
어렵게 받은 기록에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 의사가 설명한 예강이 상태와 차트에 기록된 내용이 달랐다. 최 씨는 “당시 예강이에게 했던 병원 측의 조치와 이후 넘겨받은 의무기록의 내용이 달랐다. 직접 당시 CCTV까지 확인해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용을 바로 잡은 시점은 이미 의무기록을 감정한 이후였다. 병원 측이 임의로 수정한 기록이 그대로 감정에 맡겨지고, 법원에 증거로 제출돼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였다. 최 씨가 병원 측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 소송은 2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발행하는 ‘사법연감’을 보면, 의료사고와 관련된 민사소송은 해마다 1000건 가까이 접수되고 있지만 승소율은 매우 낮다. 지난해 처리된 960건의 사건 가운데 원고가 이긴 경우는 14건으로 승소율은 1.4%다. 지난해 일반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율(10.6%)와 비교하면 7분의 1 수준이다.
승소율이 낮은 건 입증책임이 의료과실을 주장하는 환자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환자는 의료인의 과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한다. 하지만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야인 데다, 병원에서 작성한 기록을 가지고 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 의료 소송을 진행 중인 한 변호사는 “의무기록 감정도 환자 측에 불리하다. 감정은 법원이 결정한 곳으로 보내지만, 어쨌든 의사밖에 할 수 없는 작업이고 결국 같은 의국, 또는 동문에게 가기도 한다“며 ”감정의도 받아보면 어떤 의사가 한 일인지 다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의료 소송에 대해 ‘백전백패’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진=일요신문 DB
예강이 사고에 대한 조정 각하 사실이 알려지면서 2014년 3월 당시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이던 오제세 의원은 피해자가 조정신청을 하면 병원 측이 자동으로 응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바로 ‘예강이법’이다. 여기에 2014년 10월 가수 신해철 씨 사망으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 씨 가족과 지인들은 억울한 의료사고 피해자를 돕자는 취지에서 ‘예강이법’을 ‘신해철법’으로도 지칭하며 법안 통과를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법안의 국회 통과를 위해선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거쳐 상임위 전체회의, 법제사법위원회, 본회의를 거쳐야 하는데 앞서의 법안은 현재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일 열린 법사위와 본회의에서 통과되리라 예상됐던 법안은 순서에 밀려 상정되지 못했다. 여‧야간 테러방지법 협상으로 저녁 늦은 시간 열린 법사위에서 의사일정 67건 가운데 61번에 들어 있던 신해철법은 본회의 절차 때문에 법사위가 정회되며 논의기회를 갖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국회의 단순한 의사일정 탓이 아니라 의료계의 강력한 이의제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보건 복지의 중요한 의사 정책을 결정하는데 가장 힘 있는 집단이 어디겠느냐. 지역구의 오피니언 리더인 의사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의원실 보좌관은 “기본적으로 의사집단들이 반대하기에 안 되는 거고. 조직이 굉장히 크니까 각 지역구에서 지역 의사들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실제로 대한의사협회는 예강이법이 발의됐을 때 의사들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조정 신청이 남발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고, 공개적으로 법안 통과를 막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예강이 어머니 최 씨는 “의료사고 입증이 너무 힘들어 그냥 묻어버리는 이들이 많다. 아무것도 모르고 돈도 없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며 ”나는 법의 혜택을 못 누리지만 이들이 최소한의 분쟁 조정 절차라도 밟을 수 있도록 법이 꼭 통과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최 씨는 현재 출산을 앞두고 있다. 19대 국회가 마감되기 직전인 4월이 예정일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