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엽 보고 ‘떠억’ 승환 보고 ‘휘둥그레’
▲ 이승엽이 멕시코 전에서 투런 홈런을 날리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101년 한국 야구를 새롭게 장식한 월드베이스볼클래식대회(WBC)에서 한국팀의 기세는 결국 4강에서 멈췄다. 그러나 대회 기간 우리 드림팀이 보여준 드라마는 야구 종주국인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야구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야구 초강국 미국의 무릎을 꿇리고 동양의 맹주를 뽐내던 일본을 연파한, 그들의 상식으로는 야구 소국인 대한민국 드림팀의 저력에 미국 현지 언론과 팬들도 놀라움과 감탄,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4강전까지 한국팀이 연일 승승장구하자 선수들의 주가도 덩달아 급등했다. 경기마다 메이저리그(MLB) 각 팀의 스카우트들이 줄지어 관중석에 앉아 뛰어난 선수들을 찾느라 혈안이 된 가운데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한국팀 선수들에게도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예선전에서 5홈런 10타점으로 두 부문 전체 1위를 달린 이승엽(30·요미우리 자이언츠)은 이번 대회 최대 수혜자다. 미 서부지역 유력지
야구장에서 만난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는 “Lee(이승엽)는 빅리그에서도 30 홈런을 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한 선수”라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파괴력이나 유연성, 1루 포지션, 그리고 올 시즌을 끝으로 FA가 된다는 점 등 모든 면에서 MLB 팀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단언했다. 기자에게 자신의 바뀐 연락처를 직접 적어주면서 자주 연락을 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새삼 미국 진출 전의 박찬호를 잡기 위해 1주일이 멀다 하고 계속 전화 연락을 했던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미주담당 스카우트 리처드 세코는 이승엽이 MLB에 진출한다면 뉴욕 양키스에서 뛰는 마쓰이 히데키 정도의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마쓰이는 지난 3년 간 70홈런에 330타점을 올리며 중심 타선에서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오랜 기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를 거쳐 텍사스 레인저스 스카우트로도 활동한 미국통인 세코는 올 시즌 이승엽이 좋은 활약을 펼칠 경우 요미우리와 빅리그팀 간에 이승엽 쟁탈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점쳤다. 그는 이승엽이 홈런 타자보다는 중장거리 타자로 자리잡을 것을 예상했다. 20~25홈런에 100타점을 올릴 수 있는 잠재력도 인정했다.
한국과 격돌한 팀들의 감독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은 선수는 바로 유격수 박진만(30·삼성)이었다. 워낙 수비 폭이 넓고 풋워크가 좋아 오히려 화려해 보이지 않는 박진만의 수비는 야구 본토의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탄탄한 기본기에 입각한 물샐 틈 없는 철벽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포지션과 타력, 나이 등을 고려했는지 박진만을 선뜻 데려가겠다는 팀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오승환은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
그러나 빅리그 팀에서 원하는 아시아 선수의 유형은 세 가지로 집약되기 때문에 한국 드림팀 멤버에 스카우트의 손길이 집중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스카우트들이 우선 눈길을 주는 것은 투수다. 이번 대회에서도 증명이 됐듯이 야구는 결국 투수 놀음이다. 뛰어난 투수의 자질을 가진 선수가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는 것이 빅리그 스카우트들이다.
한국팀은 이미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주축이 됐고 국내파들은 이번 대회에서 크게 돋보이는 활약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오승환(24·삼성), 손민한(31·롯데) 등이 현지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끌었다.
오승환의 겁 없는 대담성에 구속은 145㎞ 정도지만 무섭게 꿈틀대는 공 끝의 위력은 시속 160㎞ 이상으로 느껴진다는 다소 과장된 평가까지 나왔다. 손민한은 홈팀 미국을 맞아 예리한 제구력과 팔색조 변화구로 초반 위기를 넘기고 깔끔한 피칭을 해 주목을 받았다.
투수 외에 빅리그에서 관심을 갖는 선수는 홈런 파워가 있는 거포와 리드오프 타자, 즉 1번 타자감이다. 그런 점에서 이병규가 WBC에서 타격 슬럼프에 빠졌던 것은 아쉽다. 타격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병규지만 현지 전문가들 앞에서 재능을 뽐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강타자로서 각광을 받은 이승엽 외에 홈런을 친 최희섭이 이미 LA 다저스 소속이고 주포 김동주는 불의의 부상으로 본토에서는 전혀 뛰지 못해 역시 실력 발휘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물론 이번 대회에서 한국의 투수진을 이끌며 마무리와 선발로 종횡무진 활약해 재평가를 받고 있는 박찬호와 LA 다저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서재응,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가 재계약한 것을 너무도 기쁘게 만든 김병현 등이 다시 한 번 진가를 인정받았다. 한화로 복귀한 구대성도 여전히 마운드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번 WBC 대회는 한국 선수들 개개인보다도 ‘한국 야구’의 강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한국팀의 플레이에 대한 칭찬은 끝이 없었다.
‘가장 기본이 탐탄한 팀’ ‘절대 스스로의 실수로 무너지지 않는 팀’ ‘끈질긴 투혼과 탄탄한 팀워크의 팀’ ‘기본기에 충실하면서도 득점을 만들어 낼 줄 아는 팀’ ‘다양한 구질을 모두 스트라이크로 던질 줄 아는 투수들’ ‘볼에는 손이 나가지 않으면서도 스트라이크존을 완벽히 커버하는 끈질긴 타자들’….
아울러 현지 언론에서는 김인식 감독의 야구 철학과 한국 야구의 철학 등을 운운하면서 새로운 동양야구 철학을 발견했다는 식으로까지 한국팀의 선전을 미화하기도 했다.
미국이 전 세계에 야구를 널리 알리고 종주국의 위력을 과시하겠다며 주도해서 만든 WBC에서 정작 미국은 4강에도 오르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 드림팀을 스타로 만들며 일본, 쿠바, 도미니카 등이 4강에 올라 격돌하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비록 결승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WBC에서 가장 각광을 받은 팀은 대한민국 드림팀이었다.
민훈기 스포츠조선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