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가는 정책·노선…‘양보는 곧 죽음’
▲ 노무현 대통령(왼쪽), 김근태 의장 | ||
독배를 마시는 심정으로 마지막 대권 승부수를 던진 GT의 대변신 플랜과 노 대통령의 후반기 국정운영 기조가 정면 충돌하는 양상이다. 양측의 균열은 민심 수습 방안과 각종 개혁정책, 정계개편 방향, 차기 대권구도 등과 맞물려 더욱 심화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 “차라리 갈라서자”는 강경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합과 화합’을 기치로 닻을 올린 ‘GT호’가 출항하자마자 ‘참여정부호’의 정책·노선과 부딪히면서 대충돌 위기에 봉착한 형국이다. 또 이러한 기류는 향후 정국 주도권 및 대권구도 재편 문제와 맞물려 여권 분열을 촉발하는 매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시화되고 있는 당·청 간 갈등 정점에는 노 대통령과 GT가 자리잡고 있다. 당 의장 취임 이후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GT의 대권 승부수와 노 대통령의 국정 구상 고집이 충돌하면서 당·청 간 갈등의 골도 깊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GT는 당 의장 취임 후 실용주의 노선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지방선거 참패로 드러난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민생·경제 문제 해결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것이다. GT가 당 의장 직속기구로 ‘서민경제회복추진본부’를 설치키로 한 것도 이러한 판단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소장파는 참여정부의 대표적 개혁정책인 부동산 정책과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에 대한 대폭적인 손질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 측이 ‘중단 없는 개혁’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소장파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야말로 ‘통제불능’ 상태다.
21일로 예정됐던 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계획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잠복된 당·청 간 갈등의 결정판이다. 청와대 요청으로 마련된 국회 시정연설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14일 “여야가 법안 처리에 대해 합의해 당초 연설 목적이 충족됐기 때문에 국회 연설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해명했지만 취소 배경을 둘러싸고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당초 국회 연설을 통해 주요 법안의 처리에 대한 협조 요청뿐 아니라 지방선거 결과에 따른 후반기 국정운영 구상을 밝히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열린우리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기자에게 “노 대통령이 선거 참패에 따른 소회를 밝힐 경우 민심을 반영할 구체적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며 “노 대통령의 스타일에 비춰볼 때 또다시 ‘연정’ 등 깜짝 카드를 꺼내들 수 있고 이 경우 야당의 반발은 물론 여권 내부도 충격파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국회 연설을 청와대 측이 먼저 요청한 사실에 비춰볼 때 노 대통령이 뭔가 ‘준비된 카드’가 있었던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청와대 측이 준비한 카드를 간파한 GT와 당 지도부가 이를 제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권 일각에서 대통령 국회 연설을 둘러싸고 ‘GT 제동설’이 나도는 것도 이러한 가능성과 무관치 않다. GT는 청와대가 국회 연설 취소를 발표하기 하루 전인 13일 당사를 찾은 이병완 비서실장에게 “노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 각별히 신경써 달라”고 주문했다. 소속 의원들이 대통령 연설에 주목하고 있고 국민도 관심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겉으로는 ‘정중한 주문’ 같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잔뜩 가시가 돋쳐있다. 당·청 갈등이 가시화되면서 여권 내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대통령이 자중해 줬으면 하는 GT의 복심이 깔려 있었던 것.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말 조심하라”는 경고성 주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이었다.
GT의 의중을 간파한 이 실장은 몇몇 청와대 수석과 회의를 한 후 노 대통령에게 ‘연설 취소’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사정을 떠나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연설 내용까지 당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당황했을 것이고 예상치 못한 GT의 강드라이브에 화가 나 먼저 연설 취소를 결정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노 대통령의 연설 취소 배경과 관련해 ‘GT 제동설’이 나돌고 있는 정황들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연설 취소 배경과 관련해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회 연설 취소 소식을 접한 야권은 한 목소리로 “국회와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성토하며 연설 취소 배경 및 지방선거에 나타난 참여정부 중간심판에 대해 노 대통령이 직접 입장을 밝힐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기자에게 “노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전격 취소한 배경에는 당·청 간 갈등 외에 노 대통령의 향후 국정운영 구상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중진 의원은 “청와대 관계자에게 들었다”며 “노 대통령이 이번 국회 연설을 통해 5·31 민심을 반영한다는 명분으로 지방행정을 총괄하는 행자부 장관을 야당 추천 내지는 야당 성향의 인사로 발탁하겠다는 ‘깜짝 발언’을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즉 사실상의 연정 제안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민노당 권영길 대표도 15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노 대통령이 퇴임 이후를 상정한 자기 관리에 들어갔다고 본다”며 “거국 내각 제안이 오더라도 참여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여권 분열과 정계개편 소용돌이에 몰린 노 대통령이 또 다시 연정 내지는 거국 내각 구성 제의 등 깜짝 카드를 제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노 대통령이 실제로 국회 연설을 통해 연정 내지는 거국 내각 구성을 전격적으로 제안하려 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노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에 비춰볼 때 이번에도 돌출 발언 내지는 충격 카드를 제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특히 GT 입장에서는 노 대통령이 예상치 못한 발언을 할 경우 적잖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당을 추스르고 자신의 대권 플랜과 직결된 지도력과 대중성을 높이기 위해 ‘올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충격 발언은 야당은 물론 일시 봉합 국면을 맞고 있는 여권 전체에도 큰 충격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연설 취소를 둘러싼 갖가지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그 저변에는 노 대통령과 GT의 치열한 기싸움이 깔려 있을 것이란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또 정책과 노선에 따른 불협화음이 ‘노-GT 갈등’의 신호탄이라면 향후 본격화될 정계개편 및 대권구도 정국에서 양측의 갈등은 절정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정책과 노선 투쟁은 민심 이반에 따른 책임론 및 주도권 장악을 위한 상호 기싸움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하나 정계개편 및 대권구도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권 일각에서는 현재 노 대통령이 ‘개혁의 후퇴’라는 명분으로 GT를 위시한 여권 새 지도부의 ‘수정 노선’에 반대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청와대가 여권 지도부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자칫 GT에게 힘쏠림 현상이 나타날 수 있고 이는 대통령의 레임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다. 또한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경우 노 대통령의 ‘차기 구상’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