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 얻으려 후배와 매일 술자리…‘흙수저’는 재력가와 결혼을 수단으로 삼기도
술잔을 기울이던 한 검사가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를 듣고 놀란 얼굴로 내뱉은 말이다. “집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렇게 재산이 많은 줄은 몰랐네요. 그냥 검사장 되신 거 아니네. 역시 실력하고 돈하고 다 있어야 잘되는 것 같아.”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옆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다른 검사는 “나처럼 돈도 없고 배경도 없이 태어난 흙수저들은 진짜 버티기 힘든 곳이네요.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는데 실력이 부족하니…”라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상식은 서초동 법조계에서도 진리라고 한다. 특히 판사보다는 검사가 더 재산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진은 서울중앙지검. 일요신문DB
올해 법조계 재산공개 대상자 가운데 1위는 진경준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21기·검사장)이 차지했다. 진경준 본부장이 신고한 재산은 156억 5609만 원으로 법조계 고위직 214명 가운데 최고였다. 주식양도 대금과 배당금 수입 덕분에 한 해에만 39억 원의 재산이 늘어났다. 진경준 본부장은 5년 연속 법조계 재산공개 대상자 1위를 달리던 최상열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2위로 끌어내렸다. 최 부장판사의 재산은 153억 8465만 원으로 진 본부장보다 3억 원가량 적었다.
1위는 검사가 차지했지만 그 아래 최상열 부장판사부터는 전부 판사였다. 100억 원이 넘는 자산가 4명 중 진 본부장을 빼고 다 법원 소속이었던 것. 심지어 50억 원 이상 상위권 역시 전부 고위 법관들 차지였다. 법무부·검찰에서는 노승권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가 47억 6793만 원으로 진 본부장 뒤를 이었지만 법조계 전체에서는 12위에 그쳤다.
대법원, 헌법재판소, 법무부 등 법조계 고위 공직자 214명의 평균 재산은 20억 1171만 원. 진경준 본부장 덕분에 법무부가 평균 35억 원으로 기관 중 가장 돈이 많았고, 법원(20억 원)이 검찰(15억 원)보다 평균 재산이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법원이 늘 검찰보다 평균 재산이 많다보니 ‘역시 성적 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판사들이 사법연수원 성적이 더 좋았기 때문에 더 좋은 집안과 결혼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재경지역 한 부장검사의 농담이 섞인 설명이다.
“사법연수원 다닐 때도 사실 성적순이 쫙 나오지 않습니까. 1등부터 100등까지 이렇게. 그런데 20년 전에는 판사가 검사보다 임용 성적이 좋았다보니 중매 시장에서 조금 인기가 더 있었던 것도 있죠.”
지난 인사에서 고등법원 부장으로 승진한 한 판사의 추억이 이어진다.
“우리 때는 당시 검찰, 법원 고위층 인사들이 연수원생 중에서 눈에 띄는 애들을 찾아서 나이 대가 비슷한 딸과 선을 보게끔 했죠.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던 저도 몇 번 끌려 나가서 만나곤 했는데 아무래도 배경을 의식하다보면 불편하더군요. 그래도 그때만 해도 하늘같았던 연수원 교수님이 ‘존경하는 아무개 검사장, 법원장님 자제분’이라며 만들어 준 자리이니 나갈 수밖에 없었고 또 상대방이 아주 싫지 않으면 한두 번 더 만나곤 했죠. 저는 아니지만 그렇게 만나 결혼한 동기들도 있습니다.”
이미 성공한 검사장,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에게는 지나간 청춘의 추억이지만 평검사·평판사에게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한 평검사는 “검사는 동료, 후배들과의 술자리도 잦고 그 비용도 위로 올라갈수록 만만치 않다”며 “타고난 배경이 없는 검사는 생활비와 자녀 양육까지 생각하면 능력이 있어도 올라갈 수 없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검찰 내에서는 ‘실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우수한 자원이 양육비 등 현실적인 문제로 그만두는 사례가 적지 않다.
변호사 업계로 가지 않고 회사(검사들은 검찰 조직을 회사라고 부른다)에서의 경쟁을 선택했다면, 그 안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바로 ‘평판’이다. 큰 조직 같지만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검사들 사이에선 실력과 인품을 묶은 평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요한 보직은 끌어주고 밀어주는 게 절대적이다. 그러다보니 실력과 인품을 배경으로 ‘관계’를 만드는 자리가 거의 매일 펼쳐진다.
대법원 전경. 일요신문DB
한 부장검사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20년 가까이 근무한 부장검사는 함께 일하고 있는 팀 검사들과 매일 저녁을 먹는다. 술자리로 이어지는 것도 빈번하다. 근무 때의 불만을 풀고 고민도 공유해야 한다. 함께 근무하는 수사관과 실무관의 사기도 챙겨야 한다. 과거와 미래의 인연도 소중하게 챙겨야 한다. 과거 팀 동료들과의 술자리가 생기면 달려가야 하고 같은 지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같이 근무할 수도 있는 후배 검사들과의 술자리도 만들어야 한다. 후배 여럿 데리고 양주를 먹고 택시비까지 쥐어주고 나면 하루에만 100만 원이 넘는 돈이 지갑을 빠져 나가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고위직 대부분이 부자인 이유가 편하게 검사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집안 배경 덕이라는 말이 나온다. “집안에 ‘금전적인 배경’이 없으면 결혼을 해서라도 이를 장착해야 한다”는 조언을 후배 검사에게 자연스럽게 건넬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실제로 배경을 타고 나지 못한 흙수저 검사들은 ‘결혼’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간다. 중매 시장에서 판·검사 사위는 10억 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맥락이다.
돈이 ‘너무’ 많은 게 좋은 일만은 아니다. 주식 등 투자 과정에 의혹이 제기되기 때문. 이에 대해 한 검사는 “그러실 분들이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이 너무 많은데 고위직에 계시다보니 이런 저런 의혹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검사 역시 이렇게 얘기한다.
“돈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검찰총장 후보 됐을 때 국회 청문회나 언론으로부터 공격받을 수밖에 없겠죠. 그래도 돈은 많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족들 고생 안 시키고 싶고 후배들 좋은 술 마음껏 사주고 싶고 고생하는 수사관들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정말!”
재산이 고스란히 공개되는 것도 골치다. 수십억 원의 재산을 보유해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한 법조인은 “최근에 배우자가 너무 돈을 잘 벌어서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틈만 나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그는 “배우자가 하는 사업이 잘돼서 돈을 많이 버는데 그 사유를 적는다고 해서 국민들이 곱게 보겠어요? 솔직한 마음으로 배우자가 하는 일이 내심 조금만 덜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라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상식은 서초동에서도 진리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판사보다는 검사가 더 재산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두 직업 모두 선후배 술자리와 자녀 교육 등을 생각하면 돈이 절실한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매년 인사로 성적표를 받기 때문에 ‘관계’를 챙겨야 하는 검사의 간절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남윤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