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매국노…날 버린 게 누굽니까”
▲ 지난 3일 템파베이전에서 시즌 2승째를 거둔 백차승. 빛나는 투구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그에 대한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다. 로이터/뉴시스 | ||
그러나 야구인들이나 야구 전문 기자들은 백차승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가 한국을 떠났을 때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영구 제명을 당한 상태였고 99년 출국 후 한국에 단 한 차례도 들어오지 않은 데다 최근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등의 얘기까지 있기 때문에 백차승을 평범하지 않은 야구 선수로 몰아갔던 것이다.
네티즌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백차승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벌이며 진실 게임을 벌였다. 병역기피를 위해 국적을 변경했다느니, 98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진출을 위해 팔을 아끼려고 자진 강판당해 팀의 패배에 빌미를 제공했다느니, 그래서 다시는 한국 야구계에 발을 내딛을 수 없는 영구제명 상태라느니….
백차승은 그리 유명한 선수가 아닌데도 그를 둘러싼 ‘소문’들은 기자가 감당하기가 벅찰 만큼 다양한 스토리로 회자되었다. 이 모든 소문들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사 검색을 해보니까 그와 직접 인터뷰한 기사가 없었다. 최근 보스턴전에서 선발승을 이룬 뒤 한 스포츠신문 기자가 직접 라커룸에서 만나 그와 인터뷰를 한 게 처음일 정도였다. 하지만 경기 소감만 짤막하게 다뤄졌을 뿐이었다.
백차승을 직접 인터뷰하기 위해 이리저리 연락처를 수소문했지만 미국에 있는 기자들조차 그의 연락처를 몰랐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았고 그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백차승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거절하려 했다. 그는 백차승이 오래 전에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최근 ‘제2의 유승준’이라는 내용으로 국적 변경 문제가 다시 기사화되면서 또 다시 상처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래도 포기하기가 어려워 거듭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기자의 간절함 때문인지 마침내 그는 백차승과 전화 연결을 도와줬다.
‘대인 기피증’이란 소문까지 나돌았던 백차승은 너무나 멀쩡한(?) 목소리로 기자에게 반가움을 전했다. 두 시간 넘게 전화 통화를 하면서 백차승은 한국 기자와 처음으로 속에 있는 말을 한다면서 많은 과거사들을 쏟아냈고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그가 너무나 오랫 동안 숱한 ‘오해의 굴레’들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백차승과의 장시간 인터뷰를 정리해 본다.
―이렇게 목소리를 듣게 돼 너무 반갑다.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전화 연결이 너무 어려웠다.
▲(웃으면서) 시애틀 매리너스 클럽 하우스에 오면 언제든지 날 볼 수 있다. 난 도깨비가 아니다. 야구하는 야구 선수일 뿐인데 날 이상한 시각으로 보는 기자들이 있다.
―기사 검색을 해보니 인터뷰가 거의 없었다. 기자들과의 접촉을 꺼린 이유가 있나.
▲날 찾아온 기자들은 만났다. 그런데 내 앞에 나타난 기자가 그리 많지 않다. 추신수가 시애틀에 있었을 때는 기자들이 신수를 통해서 만나자는 연락을 한다. 신수랑 같은 클럽하우스에 있는데 왜 직접 날 찾지 않고 신수를 시켜서 인터뷰를 하자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런 상황에선 응하지 않았다. 몇 차례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후로 내가 기자를 기피한다는 소문이 나더라.
―지난달 28일 보스턴과의 홈경기에서 올시즌 첫 승을 올렸다. 소감이 남달랐을 텐데.
▲1998년 시애틀과 입단 계약을 맺고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다 1999년 6월 가까스로 출국해 그때부터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 잠깐 메이저리그 맛을 봤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내려갔고 2년 만에 빅리그로 복귀해서 처음 거둔 선발승이다. 여기저기서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데 이제부터 시작이다. 밑바닥 생활을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 메이저리그에 있다고 해서 들뜨거나 허황된 생각이 들지 않는다.
▲ 연합뉴스 | ||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힘들었다. 미국에 건너와서 2004년까지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애리조나 등으로 캠프를 떠나면 주변의 한인 식당에서 내 또래의 유학생들을 만나 잠시 얘기 나누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어쩌면 한국을 떠나면서 당한 일들로 인해 스스로 문을 걸어 놓고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오프 시즌 때는 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낚시나 운동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한국에 들어온 적이 없었나. 어느 기사에선 99년 출국 후 단 한 차례도 귀국하지 않았다고 썼던데.
▲작년 시즌 끝나고 겨울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갔었다. 7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 참 많이 울었다. 보고 싶었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오랫동안 마음의 병처럼 자리했던 향수병, 그리움 등을 달랠 수 있었다. 한국에 갔다 와서 생활이 많이 밝아졌다. 올 시즌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것도 그런 시간들이 활력소로 작용한 듯하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1998년으로 돌아가 보자. 9월 12일 일본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만과의 준결승에서 선발 등판했다가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자진해서 경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 일로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영구 제명이란 중징계를 받았다. 당시 기사를 검색해 보니까 미국 진출을 위해 팔을 아끼려고 일부러 공을 던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당시 한 스포츠신문의 미확인 보도로 인해 난 ‘배신자’로 내몰렸다. 대만과의 준결승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정말 팔꿈치가 너무 아팠다. 일본전에서도 통증이 있었는데 안티프라민을 바르면서까지 통증을 참고 던졌다. 그러나 대만전은 그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그래서 감독님께 통증이 심해 더 이상 던질 수 없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나더러 1루를 맡으라고 하시더라. 팔이 아파서 공을 못 던지겠다는 선수에게 1루를 보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래서 못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마운드에서 내려온 이후 팀이 역전패를 당했다. 나 때문에 진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을 갖고 귀국을 했다. 그런데 협회에서 상벌위원회를 열었고 거기에 내가 불려 나가게 됐다. 우리가 대만에 진 이유가 내가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됐고 이게 팀 전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상벌 위원 중 한 분이 모 스포츠신문 기사를 내보이면서 ‘아버지가 일본에 와서 더 이상 던지지 말라고 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 기사에 그렇게 나왔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 오질 않았고 나에게 던지라 말라 말한 적이 없었다고 강변했지만 그분들은 내 말보다 그 기사를 더 믿는 눈치였다. 그 이후 상벌위원회에선 날 한국 야구계에서 더 이상 뛸 수 없게끔 영구 제명을 시켰다.
―그런 사연이 숨어 있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학생 야구였고 국제 친선 대회였는데 영구 제명을 시킨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정말 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이다. 팔이 아파서 더 이상 던지지 못하겠다고 말한 게 그리 잘못한 건가. 그렇다면 팔이 부러지거나 말거나 감독의 지시라면 무조건 공을 던져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지면 결과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가. 너무 너무 화가 났고 감독님에 대해 실망했다. 제자의 앞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만약 내가 미국으로 가지 못했다면 난 야구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나오게 됐고 그런 상황을 묵인하셨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그 기사를 쓴 기자도 너무 무책임했다.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 왔는지 안 왔는지 직접 확인이라도 해봤나. 어떻게 아버지가 일본까지 와서 미국 가야 하니까 팔을 아끼라고 말할 수 있겠나.
▲ 7년간의 너무나 외로웠던 미국 생활. 그래서일까, 백차승은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올라왔지만 그다지 들뜨거나 허황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고백한다. 로이터/뉴시스 | ||
▲한국에서부터 팔꿈치 인대가 좋지 않았는데 예상대로 시애틀에서의 신체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다. 시애틀 측에선 계약을 맺기 전이라 날 그냥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애틀은 129만 달러를 주고 계약을 강행했다. 그후로 오랫동안 제대로 된 공을 던지지 못했다. 정말 너무나 던지고 싶었고 그럴 수 있도록 피나는 훈련을 했는데 속도가 붙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 남은 인대마저 다 나갔고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할 때 상벌위원회 분들이 생각났다. 내가 미국 와서 팔꿈치 인대가 다 나가서 수술하는 걸 안다면 날 영구제명시킨 사람들이 어떤 심정일까 하고. 그 대회에서 정말 아파서 못 던진 게 사실로 드러난 거 아닌가.
―입단 계약 후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바로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이듬해 6월이 돼서야 미국으로 들어갔다. 무슨 사연이 있었나.
▲난 참 운이 없는 놈이다. 우여곡절 끝에 입단 계약을 맺고 출국해 스프링캠프에 합류하려 했지만 이번에 비자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시애틀과 입단 계약을 맺은 사실까지 알면서도 미국 영사가 계속 퇴짜를 놨다. 결국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도 못했고 6월까지 기다리다가 시애틀 구단 측에서 변호사까지 선임해 일을 처리한 덕분에 가까스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3개월짜리 조건부 비자였다. 6월 25일이 출국일이었는데 결코 잊지 못한다 그 날짜를.
―요즘 국적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제2의 유승준’이란 말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여부를 밝혀 달라.
▲너무나 어렵게 미국에 들어왔다. 다시 돌아가서 또 다시 비자를 거절당하면 미국에 올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 남을 경우 제명된 상태라 공을 던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미국에 남기로 한 것이다. 인터넷 보니까 내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국적을 바꿨다고 하는데 만약 병역 면제를 받으려 했다면 팔꿈치 수술만으로도 면제 대상이 되는 것으로 안다. 또 국제 대회에 참가해서 정정당당히 면제 혜택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과연 나한테까지 오겠나 싶었다. ‘배신자’ 백차승을 국가대표로 뽑아 줄 감독이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두렵고 용기가 안 났지만 욕 먹을 각오를 하고 국적을 포기했다. 98년에 날 ‘배신자’로 내몬 그 스포츠신문에서 또 다시 내가 병역 기피를 위해 미국으로 도주했다고 썼더라. 난 야구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미국이란 큰 무대에서 야구를 하고 싶었고 야구를 할 수 있게 기회를 준 곳도 이곳이다.
―미국 시민권자와의 결혼을 통해 시민권을 얻었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인가.
▲그 부분에 대해선 지금 말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에 대해 어떤 얘기가 나도는지 알고 있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좀 더 내 상황이 안정된 이후에 밝히겠다. 미안하지만 기다려달라.
―그래도 궁금하다. 워낙 이 부분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많기 때문이다.
▲이 얘기만 하겠다. 내가 미국 시민권을 딸 때 나 말고도 미국 시민권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70~80명 정도 됐다. 그들은 시민권을 받아 들고 서로 부둥켜 안고 기뻐했는데 난 가슴으로 울었다.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이었지만 막상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는 게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야구를 할 필요가 있을까 갈등이 있었지만 7년 동안 젊음을 바친 미국 무대에서 꼭 성공하고 싶었고 주어진 기회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미국 시민권을 딴 후 생활이 달라졌나.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만약 외국 사람이 한국으로 귀화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한국인으로 보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민권만 가졌을 뿐 난 영원히 한국 사람이고 그들 눈에는 용병일 뿐이다.
백차승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되뇌었다. ‘미국이란 이 넓은 땅 덩어리가 나한테는 철창 없는 감옥’이었다고.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지난 8년간의 세월을 훑어 내려간 그는 <일요신문>을 통해 처음으로 심경 고백을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씌어진 ‘배신자’ ‘매국노’란 굴레가 없어지겠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사연이 많은 스물여섯 살 청년이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