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보세요, 다음엔 더 세질테니까”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종격투기 K-1 데뷔전에서 42초 만에 TKO승을 거둔 전 WBA 슈퍼페더급 챔피언 최용수(35·티엔터테인먼트)와 지난 12일 강남의 ‘화로사랑’이란 고기집에서 ‘취중토크’를 가졌다. 세상에서 인터뷰하는 걸 가장 싫어한다는 그는 소주 몇 잔에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기자와 인연 또는 악연(?)의 끈을 이어온 덕분에 ‘누나’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쓰는 최용수가 유난히 살갑게 느껴졌다.
복싱 은퇴 후 K-1에 데뷔하기 전까지의 어려웠던 생활이 덧셈에 곱셈까지 돼 미화되고 화려하게 치장된 부분들이 너무나 싫었다는 그의 캐릭터는 한 마디로 ‘남자’였다. 오랜만에 술과 사람에 취했던 ‘취중 토크’라 그런지 ‘숙취’가 장난 아니었다.
1차‘원샷’으로 Go!
지난 16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최용수의 데뷔전은 한마디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이뤄졌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상대 선수에게 득달같이 달려든 최용수의 선제 공격도 놀라웠지만 무에타이 챔피언으로 알려진 드리튼 라마가 팔도 뻗어보지 못하고 링 위에 쓰러진 장면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최용수는 “자신도 어이가 없는데 보신 분들을 얼마나 어이가 없겠느냐”면서 최용수다운 솔직한 멘트로 소감을 대신했다. 그러나 분명 최용수는 데뷔전을 TKO승으로 장식하며 나름대로 화려한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의 경기 상황을 떠올리며 소주 한 잔을 가볍게 털어 넣은 최용수는 바로 잔을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담담할 줄 알았는데 이기니까 기분은 좋더라구요. 링 위에 서 있는데 이상하게도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효도 한 번 못 하고 살았거든요. 격투기 한다고 하니까 막내 아들이 다시 매 맞는 직업을 택했다며 속으로 우셨던 분이세요. 팬들은 좀 더 치고받는 통쾌한 경기를 기대했겠지만 우리 어머니만은 제 얼굴이 깨끗한 상태에서 경기가 끝난 걸 신께 감사했을 겁니다.”
▲ 지난 16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최용수의 ‘K-1 파이팅 네트워크 칸 2006 서울대회’ 데뷔전. 그는 스웨덴 무에타이 챔피언을 맞아 일방적인 공격을 펼치며 1회 KO 시켰다. | ||
“제가 정말 좋아하는 유명우 선배가 경기를 보러 오셨음 했어요. 그런데 직접 전화를 드리지 못하겠더라구요. 혹시 선배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깨지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서 연락을 안 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직접 표를 끊어서 일반 관중석에서 지켜보셨나 봐요.”
최용수는 K-1 진출을 발표한 후 줄곧 자신을 짓눌렀던 게 바로 전 세계 챔피언이란 타이틀이었다고 한다. 복싱인들을 욕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훈련 중간 중간 도망가고 싶은 유혹과 싸우느라 많이 힘이 든 모양이다.
최용수와 티엔터테인먼트의 양명규 대표, 그리고 최용수와 동고동락하는 매니저 이승환 씨가 함께한 술자리는 눈이 핑핑 돌 만큼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페이스 조절을 하지 않으면 인터뷰가 끝나기도 전에 고꾸라질 판이었다.
2차 ‘폭탄주’에 붕괴되다!
소주 4병이 비워질 때 쯤 맥주와 함께 맥주잔이 등장했다. 술을 ‘말기로’ 한 것이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이럴 줄 알았음 숙취 해소 드링크제라도 먹고 오는 건데’하고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끝까지 한 배를 타고 ‘전우애’를 불사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진기자가 일(촬영)을 마치자 약속이 있다며 가버리는 황당 시추에이션에도 흔들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폭탄주를 어김없이 원샷하면서 최용수는 이런 속내를 내비쳤다.
“사실 훈련 많이 못했어요.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잘 알았지만 훈련에 집중이 안 되더라구요. 제가 남아프리카로 전지훈련을 떠났잖아요. 그런데 기초 체력이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훈련을 받으니까 돌겠더라구요. 어떻게 하면 여기서 도망칠까 하는 궁리만 했죠. 주위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한 달 만에 몰래 귀국했어요. 물론 여기 계신 양 이사님 허락하에 들어온 거구요.”
양명규 대표는 못 들어오게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단다.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살 만큼 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에게 무조건 안 된다고 핏대 세우면 분명 어디로 튈 것 같은 분위기였다는 것.
▲ 세상에서 인터뷰하는 게 제일 싫다는 최용수가 승리의 여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술의 힘이었을까,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술이 셀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남자 도통 흔들림이 없다. 술자리를 ‘오픈’한 지 두 시간이 넘어가는데도 화장실조차 안 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 기자의 혀가 살짝 꼬이는 걸 느끼면서 본격적인 ‘취중토크’의 서막이 올라가는 듯했다.
3차 술 잔 세는 걸 포기
최용수는 데뷔전을 앞두고 충남 홍성의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뿐만 아니라 증조, 고조 할아버지의 산소까지 다 돌면서 ‘절 도와주세요. 정말 딱 한 번만 절 도와주세요’라고 빌고 또 빌었다며 눈물을 그렁거린다.
“복싱할 때도 경기 앞두고 조상님들을 찾아 다녔어요. 그런데 그때는 어떤 습관적인 의식 같았는데 이번에는 아주 절박해 지더라구요. 제발 데뷔전만 이기게 해주신다면 그 다음부터 정말 열심히 운동해서 효도하고 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거예요. 차라리 복싱으로 재기를 했다면 이렇게 간절해지지 않았겠죠?”
화목한 가정 생활을 이루지 못한 최용수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과 어머니에게 늘 죄스런 마음이었다. 기쁨보다는 상처를 줬다는 미안함, 행복보다는 아픔을 준 데 대한 가슴앓이로 피 멍이 들 정도였다.
“근데요, 기자 분들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앞으로 제 기사 쓰실 때 복싱 은퇴 후 막노동을 했다거나 버스 운전 기사로 일했다는 등의 얘기는 쓰지 마세요. 그거 진짜 아니거든요. 버스 기사,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쉽게 들어갈 수가 없더라구요. 돈만 생각하면 절실히 필요한 직업이었는데 그 세계챔피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포기했어요. 어떤 기사에는 제가 4년 동안 버스 기사로 일했다고 쓰여 있더라구요. 수원의 한 운수 회사에 이력서를 낸 적은 있지만 그뿐이었어요. 그리고 막노동도 해본 적 없습니다.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다가 잘 안 돼서 허송세월 보냈던 거예요.”
최용수가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K-1 진출 이후 자신의 이전 생활에 대해 소문에 소문을 보탠 기사들이 돌아다니면서 그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더 크게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44세 때 본 늦둥이 아들이 최용수다. 먹고 살기 바쁜 시절이라 막내 아들을 챙길 여력이 없다 보니 최용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거칠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으로 살고 싶다는 ‘남자’가 폭탄주 10잔을 마시고 이렇게 ‘팬들에 대한 맹세’를 외쳤다.
“나, 다음 경기는 진짜 잘 할 거야. 준비 잘 해서 실망시키지 않을 게. 날 응원하고 지켜봐준 모든 사람들에게 꼭 그 빚 갚을 테니까 두고 보라구. 최용수가 그렇고 그런 선수가 아니라는 거, 누나는 알지? 나 믿는 거지?”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