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하게 당하고 깨지고…그래도 ‘훈장’ 보며 뛴다
▲ 세계챔피언들의 과거는 화려했지만 은퇴 이후는 사기와 배신에 눈물 흘리는 힘든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챔피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종팔, 박찬희, 김상현 씨.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4전 5기의 신화 홍수환 씨(55·전 WBA밴텀급 챔피언 WBA주니어페더급 챔피언·50전 41승 4무 5패) 얘기다. 은퇴 후 책도 쓰고 노래도 불렀으며 라디오 DJ에다 기업체 강의를 나가는 등 활발히 활동했던 홍 씨는 링을 떠나선 지난 26년 동안 ‘당한 인생’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적은 가까이에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기를 친 사람들 대부분이 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은퇴하고 중년이 된 지금까지 뭐 하나 뚜렷하게 이뤄놓은 게 없는 전 세계복싱챔피언들. ‘주먹으로’ 번 돈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는 그들의 공통점은 은퇴 후엔 결코 ‘주먹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박종팔 - ‘미친 짓거리’의 연속
“아따, 뭘 그리 본다요? 그냥 싸게 싸게 질문이나 하랑께.”
전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박종팔 씨(45·53전 46승 1무 5패)는 구수한 전라(남)도 사투리로 마주 앉은 기자의 혼을 쏙 뺐다. 자신의 전체 인생을 3라운드로 구분한 박 씨는 지금까지 1·2라운드를 뛰었다면 지금부터는 3라운드를 뛸 준비 중이라며 지난 세월들을 곱씹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고 재촉을 해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때 왜 그러셨어요? 이효필 씨와의 격투기요.”
박 씨는 2003년 여름에 아마추어 시절 두 차례나 패배의 쓰라림을 안긴 이효필 씨와 재대결을 벌였는데 복싱이 아닌 격투기 선수로 등장해 관심을 모은 적이 있었다. 그 경기에서 박 씨는 4회 기권패를 당했고 그 후 죽마고우였던 이 씨와 완전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효필이가 약속을 어겼어. 신발을 신지 않고 하기로 해놓고선 신발을 신고 나온 거야. 처음엔 벗을 줄 알았지. 그랬는데 경기 시작하는 종이 울려도 신발을 벗지 않더라구. 그래서 많이 화가 났었지.”
박 씨는 짧은 연습을 거쳐 격투기 무대에 선 탓에 발을 사용하는지조차 인식이 안됐었다고 말한다.
“두 손으로만 싸워봤잖아. 그런데 효필이가 발로 공격해 오더라구. 그 순간, ‘아! 발도 쓰는구나’ 싶었지. 한 마디로 미친 짓거리 한 거지 뭐.”
80년대 한국 중량급 간판 복서로 활동하며 12년간의 화려했던 프로 생활을 마감한 박 씨가 맨 처음 시작한 일이 체육관과 프로모터 인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은퇴할 당시 약 20억 원의 재산이 있었는데 9년간 운영했던 체육관을 정리할 때는 수중에 3억 원 정도의 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93년 프로모터의 자격으로 동양타이틀매치를 기획했다가 한국권투위원회의 파벌 싸움으로 대회 자체가 무산되자 박 씨는 난생 처음 교도소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37일 ‘큰집’에서 지내고 나왔지. 인생 별 거 없더라구. 그 안에 있어보니까. 그런데 거기선 인기 짱이었어. 감방 동기들이 챔피언 들어왔다고 무지 좋아하대. 막 사인도 해주고 그랬지. 잠시 쉬러 들어왔다고 편하게 마음 먹었어. 그렇지 않으면 돌겠더라구.”
박 씨는 2002년에 개봉된 영화 <챔피언>의 제작에도 일부 참여했다. 고인이 된 김득구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영화사 측에서 박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 그러나 영화에 묘사된 자신의 이미지가 너무 엉터리라 한때는 명예훼손 소송을 검토하기도 했었단다. 자신의 역을 맡은 배우(김병서)에게 한 달여 동안 말투와 동작들을 가르치며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자신을 완전 ‘바보’로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은퇴 후의 내 삶은 한마디로 멍청한 짓거리들의 연속이었어. 세상에 어음이나 가계수표, 당좌수표의 뜻도 모르면서 그런 것들을 받고 현금으로 돈을 내줬으니까. 죄다 부도난 수표였는데도 사람을 믿고 그냥 돈을 빌려줬어. 내가 챔피언만 아니었더라면 내 돈 해 먹은 놈들 그냥 훑어버렸을 거야. 남 등쳐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볼 거야.”
가장 황당하게 당한 사기가 바로 전 세계 챔피언 K 씨 일이다. 선배였던 K 씨가 박 씨에게 접근해 자신이 벌이는 사업에 투자하면 두 배 이상 수익을 내주겠다고 말한 다음, 돈만 받아 챙긴 뒤 증발해 버렸다는 것. 그 챔피언은 지금도 연락 두절 상태다.
10년간 운영했던 역삼동 부근의 유흥주점을 정리하고 지금은 후배 양성을 위해 체육관을 운영 중인 박 씨는 다시 태어나도 권투를 하겠냐고 묻자, “그럼 천직인디 안 혀? 난 주먹 말고 다른 운동은 몰러”라고 대답한다.
박찬희 - 아직도 꾸는 대박꿈
70년대 말 한국 복싱의 황금기를 구축시켰던 주인공. ‘대학생 복서’로 지적 이미지를 형성시키며 ‘링의 대학 교수’이자 멕시코의 영웅 미구엘 칸토를 두 번이나 쓰러 뜨렸던 복싱계 최고의 테크니션! 바로 전 WBC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박찬희 씨(23전 17승 2무 4패)다. 복싱도 기가 막혔지만 그가 더 인기를 끌었던 부분은 바로 ‘미남 복서’였기 때문.
박 씨의 근황이 궁금했다. 몇 년 전 원두 커피 사업을 하던 그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지금도 그 일을 할지는 ‘가능성 제로’였다. 역시나 그는 커피 사업을 접고 지금은 건설 분양 관련 일에 뛰어다녔다.
어느덧 은퇴한 지 26년이나 흘렀다고 한다. 83년 부산에서 태극체육관을 운영하다가 89년 상경 후 웅변, 미술학원을 차렸는데 그 사연이 재밌다. 어느날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고등학교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웅변, 미술 학원을 운영 중인데 외국으로 가야하니 그 학원을 인수해달라고 부탁했단다. 학원이 잘 되기 때문에 수익이 엄청날 것이라는 말도 ‘당연히’ 덧붙였을 것이다. 순진한 박 씨는 그 선배의 말만 믿고 학원을 접수하게 됐는데 얼마 못 가 문을 닫아야 했다. 매달 적자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 왕년의 챔피언 박종팔 박찬희 김상현 씨(위부터). | ||
건설회사에서 과장이나 상임 상무로도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원두 커피 사업을 1년 정도 하다 때려 치우고 지금은 건설 분양 일을 한다고만 언급했다.
“목돈이나 큰돈을 쥐어 봐서 그런지 월급 300만~400백만 원을 주겠다고 하면 콧방귀를 뀌었지. 그 돈 받고 월급쟁이 생활을 하기가 싫었어. 항상 큰 거 하나 터트릴 생각만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 아내에게 제일 미안해.”
박 씨는 ‘내년에 돈 많이 벌 일이 있다’며 또 다시 희망가를 불렀다. 그러면서 이런 감정을 쏟아낸다.
“내 꿈이 뭔지 알아? 힘들고 어려운 애들 뒷바라지해 주는 거라구. 옛날 챔피언 박찬희가 불우이웃 성금도 내고 수재의연금도 내고, 얼마나 보기 좋겠어. 정말로 한 맺힌 게 있어. 돈만 있으면 성금 1억 원도 내고 싶은데 돈이 있어야지. 내 이름을 알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냐. 챔피언이, 복싱 챔피언 했던 사람이 성금 1억원 냈다고 하면 복싱이 달라 보이지 않겠어?”
인터뷰를 하는데 휴대폰에 불이 났다. 일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으며 박 씨가 이렇게 말한다. “난 아무리 잘못했어도 걸려온 전화는 다 받아. 그런데 어떤 사람들(챔피언들)은 번호를 확인하고 전활 받더라구. 왜 그렇게 살아? 명색이 세계 챔피언이었으면 타이틀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되잖아.”
박 씨는 비록 지금의 삶이 고단하다고 해도 세계 챔피언이란 ‘훈장’에 반하는 행동은 하고 살아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마음은 쓰리지만 사기를 치는 것보다는 사기를 당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챔피언이라면 말이다.
김상현 - 낮밤 다른 ‘이중생활’
“구포역에서 내리면 잘생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전 WBC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상현 씨(51·50전 43승 3무 4패). 그의 소재를 파악하다가 재미있는 이력이 발견됐다. 김 씨가 다른 데도 아닌 정치권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 부산 사무소에서 체육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 기자를 마중 나온 김 씨는 곧장 권 의원 사무실로 향했다. 지금까지 만난 챔피언들 중에서 가장 잘나가고 있는 케이스였다. 그러나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명함에 박힌 ‘체육부장’이란 타이틀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국회의원 비서관, 보좌관도 아닌 어정쩡한 ‘체육부장’이었기 때문이다.
“권 의원님과는 옛날 운동할 때 체육관에서 선후배로 만난 사이야. 당시 난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관장님 권유로 권투를 시작했고 공부를 잘했던 권 의원님은 계속 공부를 한 결과 각자 다른 인생을 살게 됐지. 운동 선배가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서울의 체육관을 처분한 뒤 부산에 내려왔는데 지금까지 머물고 있네.”
낮 동안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김 씨는 밤엔 완전 다른 직업으로 탈바꿈한다. 바로 유흥업소 관리다. 한때 부산에서 대형 유흥업소를 운영했지만 지금은 사장이 아닌 관리인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유흥업소 일이라는 게 보통 어렵지가 않아. 집에다 간, 쓸개 다 빼놓고 다녀야지만 살 수 있거든. 손님들이 내가 챔피언이란 사실을 알면 술 먹다가 별의별 요구를 다 해. 복싱하는 제스처를 취해 달라거나 웃통을 벗어보라는 등 제정신으론 소화할 수 없는 주문들이지. 그래도 해줘. 왠 줄 알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김 씨는 권 의원 밑에서 일하며 인격 수양을 많이 쌓았다고 웃는다. 자칫 잘못해서 권 의원 이미지에 먹칠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좀처럼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는다고 한다.
29세의 나이에 링을 떠난 김 씨는 복싱을 하는 동안 파이트머니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매니저가 분배의 원칙을 무시하고 선수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집이 제과업을 하면서 꽤 잘살았어. 돈이 아쉽지 않아서 매니저가 그런 짓을 해도 큰 관심이 없었지. 한마디로 돈의 소중함을 몰랐어.”
김 씨는 78년 세계 챔피언에 오른 후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몰래 결혼한 탓에 아이를 세상에 공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아빠’가 아닌 ‘삼촌’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그때 태어난 아들이 어느새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단다.
“애 엄마가 도망을 갔어. 혼자 키우다가 또 다른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하고도 헤어져야 했지. 혼자서 아들 키우며 참 많이 힘들었어. 나보단 아들 녀석이 더 그랬을 거야. 이젠 아내가 해주는 따뜻한 아침 밥 먹으며 살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결혼을 하지. 제정신인 여자라면 지금의 날 좋아라 하겠냐구.”
김 씨는 아이들 손 잡고 걸어 다니는 부부를 볼 때 가장 부럽다고 한다. 운동 그만두고 정신 차려서 사회 생활을 똑바로 했더라면 자신도 번듯한 가정의 가장으로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면서 살았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얼마 전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어. 나 죽으면 화장 시켜달라고. 그런 다음 부산 송도 앞바다에 뿌려달라구. 내 흔적들이 고기밥이 되어 그 고기들이 태평양을 건너가게 해달라고 말이야. 운동할 때가 제일 행복했어. 정말 그 시절로 돌아가고만 싶은데 안 되겠지?”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