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 돌려도 비슷한 목소리…거 헷갈리네~
지상파 3사가 1주일 동안 방송하는 음악 예능의 편성 시간은 무려 1000분에 육박한다. 각 70분물인 3사 가요 순위 프로그램(MBC는 순위제 폐지)을 비롯해, KBS <불후의 명곡>과 <전국노래자랑>, <가요무대>, <유희열의 스케치북>과 <콘서트 7080>, MBC <일밤-복면가왕>과 <듀엣가요제>, SBS <일요일이 좋다-K팝 스타>, <보컬전쟁-신의 목소리>, <판타스틱 듀오> 등이 일주일 내내 편성된다. 평일 낮 시간대 재방송까지 포함하면 편성 시간은 1000분을 훌쩍 넘어선다.
음악을 소재 삼은 예능프로그램의 경쟁은 최근 <듀엣가요제>와 <신의 목소리>, <판타스틱 듀오>가 잇따라 편성되며 격화됐다. 당초 MBC는 설연휴 기간 파일럿 방송돼 호평 받은 <미래일기>를 편성할 복안이었으나 SBS가 <신의 목소리> <판타스틱 듀오>의 편성을 결정하며 <듀엣가요제>로 맞불을 놓았다. <듀엣가요제>는 MBC가 지난해 추석에 이어 두 차례 파일럿 편성해 합격점을 받았지만 <복면가왕> 등과 콘셉트가 겹치는 것을 우려해 아껴두었던 아이템이다. 하지만 비슷한 포맷의 <신의 목소리> <판타스틱 듀오>가 편성된 후 정착하면 <듀엣가요제>가 설 자리를 잃기 때문에 결국 앞다퉈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SBS <신의 목소리>의 두 MC인 이휘재와 성시경. 성시경은 MBC <듀엣가요제>의 MC도 맡고 있다.
방송사들이 음악 예능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시청률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복면가왕>은 ‘전쟁터’라 불리는 일요일 예능 경쟁에서 당당히 시청률 1위를 구가하고 있다. <전국노래자랑>과 <가요무대> 역시 10% 안팎의 시청률을 거두는 장수 효자 프로그램이다.
물론 3사 순위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2~3% 수준이다. 하지만 유명 아이돌 가수들이 대거 출연해 소비계층인 10~20대가 즐겨 찾고, 광고 판매도 호조이기 때문에 방송사가 포기할 수 없는 카드다. 게다가 신인들의 등용문으로서 방송사들이 유력 연예기획사들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명맥을 공고히 다지고 있다.
이 외에도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과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 <프로듀스 101> 등 종합편성채널과 케이블채널도 음악 예능을 대표 프로그램으로 삼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제작진들은 치열한 섭외 경쟁을 벌인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가창력 뛰어난 가수가 각광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가수는 손에 꼽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가창력을 겨루는 예능의 시초라 할 수 있는 MBC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던 가수들은 이후 각종 음악 예능의 단골손님이 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잇따라 생기며 겹치기 출연을 불사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됐다.
MBC는 파일럿 방송돼 호평받은 <듀엣가요제>를 정규 편성했다. 가수 루나와 일반인 출연자 모습.
물론 방송사들도 이런 가수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편이다. <듀엣가요제>를 연출하는 강성아 PD는 제작발표회에서 “<복면가왕>에서 화제를 낳고 편견 없이 가창력을 확인받은 가수들이 <듀엣가요제>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거 같다”며 “<신의 목소리>에 나간 가수도 상관없다. <신의 목소리>는 프로그램 타이틀답게 신의 목소리라는 부담을 갖고 나가야 할 거 같은데 <듀엣가요제>에서는 가수가 아무리 열창을 해도 파트너와 합이 안 맞으면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런 부분을 표현하고 싶은 가수들의 중복출연은 환영한다”고 밝혔다.
방송사들은 ‘열린 마음’으로 중복출연을 인정하겠다고 하지만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가수들은 마냥 달갑지는 않다. 가창력을 겨뤄야 하다는 측면에서 매번 새로운 노래를 연습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 또한 한쪽에만 출연하면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다.
한 가요 기획사 대표는 “스케줄상 한쪽 프로그램의 녹화에는 응할 수 있지만 다른 프로그램의 녹화 스케줄은 기존 스케줄과 겹친다”며 “하지만 어느 한쪽만 출연하면 특정 방송사와 친분이 두텁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 부분이 MC 섭외다. 가수 성시경은 <듀엣가요제>와 <신의 목소리>의 진행을 동시에 맡았다. 지난달 28일에는 1시간의 차이를 두고 열린 두 프로그램의 제작발표회에 성시경이 연이어 참석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이 대표는 “유명 가수가 컴백하면 어느 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으로 컴백 무대를 꾸미냐를 두고 눈치싸움과 기싸움을 벌이는데 지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며 “방송사뿐만 아니라 소속 가수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매니저들은 죽을 맛”이라고 토로했다.
SBS <판타스틱 듀오> 파일럿 방송 당시 가수 임창정 출연 모습.
예능 출연을 업으로 삼는 가수들 입장에서는 출연료를 두둑이 챙기고 공식적으로 겹치기 출연까지 인정받으니 좋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사고다.
가수들이 롱런하기 위해서는 신곡을 발표하고 항상 새로운 모습을 어필하며 팬들에게 건재함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내 노래’를 부를 기회가 거의 없다. 대부분 다른 가수들이 부른 유명 곡을 리메이크하는 수준이다. 물론 리메이크곡이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를 후광으로 업고 각종 음원사이트 정상을 밟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리메이크곡 가창자가 얻는 수익은 크지 않다. 또한 리메이크곡은 사랑받는데 신곡은 외면받는 상황 속에서 가수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 다른 가요계 관계자는 “가창력을 인정받는 것은 좋지만 가수가 타인의 노래로 먹고 산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며 “많은 음악 예능이 ‘추억팔이’를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도 새로운 노래를 찾기보다는 흘러간 명곡을 더 선호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가요계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