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과의 악연’ 이제 끝났으면…
▲ 지난 11일 시리아와의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쓰러진 설기현을 향해 최주영 의무팀장이 달려가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기현이는 이상하게 부상이 잦았다. 지난 번 치른 시리아와의 아시안컵 예선전에서도 상대 선수랑 부딪힌 후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해 무척 놀랐다. 관중석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난 숨이 멎는 듯했다. 다행히 기현이가 일어나긴 했지만 경기 끝나고 보니까 오른쪽 팔 부위가 빨갛게 피멍이 들어있을 만큼 상처가 꽤 컸다. 그 아픔을 참고 경기를 끝까지 뛰어야 했으니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다.
한 번은 안정환과 부딪혀 안면 골절상을 당한 적도 있었다(2004년 2월 18일 레바논과의 독일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기현이는 당시 왼쪽 광대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아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가 풀리지 않아 상당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2003년 벨기에 안더레흐트에서 뛸 때는 무릎 수술로 전반기를 접어야 했고 2001년에는 팔이 부러지는 등 부상과는 여러 차례 악연을 맺었다. 한 번은 기현이가 이런 말을 했었다. 부상이 무서운 건 아픔이 아닌 재활 때문이라고. 그만큼 재활의 과정이 극기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2000년 7월 대한축구협회의 유망주 유럽 진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벨기에 로얄 안트워프에 입단했던 기현이는 2001년에 옮긴 벨기에 최고의 명문팀 안더레흐트에서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처음에는 헤트트릭을 터트리고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는 등 스타 반열에 오르는 듯했었다. 그러나 이후 부진에 빠졌고 부상까지 겹쳐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국에서 아들 소식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난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벨기에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아들 얼굴을 직접 보고 와야지 밥 먹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항에서 기현이와 반가운 해후를 하고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정작 기현이가 사는 모습을 본 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축구 선수로 대접받으며 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눈 앞에 펼쳐진 모습들은 완전 딴판이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미리 살림을 차린 두 사람이었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다 싶을 만큼 살림살이가 변변치 않았다. 내가 먹을 밥 공기는 물론이고 덮고 잘 이불도 없었다. 김치 담을 그릇이 없어 국 냄비에다 김치를 담근 일도 잊지 못한다.
한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가려면 차로 서너 시간을 가야하는 먼 거리라 한국 음식을 해먹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아들 내외에게 맛있는 걸 해주고 싶었지만 해줄 재료도, 그릇도 없다 보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벨기에에서 기현이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운동하고 있는지 똑똑히 확인한 셈이라 아들 얼굴 보고 기분 좋게 귀국하려던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둬야 했다.
지난 번 영국으로 이사를 간 뒤 40여 일간 기현이네 집에 머물며 짐 정리를 도왔는데 벨기에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살림살이가 늘어나 있었다. 이런저런 가재도구들이 많아서 기현이에게 이렇게 말한 게 기억난다. “기현아, 니 여기서 영원히 살래? 무신 살림이 이렇게 많나!” 이불 한 채 없어 그냥 잠을 자야 했던 벨기에 생활을 떠올리면 우리 기현이 정말 성공한 선수 맞다.
지난 번 영국에 가서 참으로 신기한 구경을 많이 했다. 한국에선 햇볕이 내리쬐면 그늘을 찾아다니는데 그곳 사람들은 해만 뜨면 옷을 벗어 제치고 일광욕을 하는 거다. 이사 날짜가 꼬여서 이영표네 집에서 일주일 신세를 질 때도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아파트 앞 마당에 여자들이 브래지어만을 한 채 벌러덩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유명 축구 선수가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녀도, 선수의 아내나 어머니가 민소매 옷을 입고 외출을 해도 수군거리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기현이가 한국보다는 외국 생활이 편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는데 직접 가서 지내다보니까 기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