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렇게 멍든 ‘도약’ 이유있는 추락
▲ 지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세단뛰기 경기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 충격의 사건 속으로
도하 아시안게임을 한 달 앞둔 2006년 11월. 육상연맹은 기대 종목이던 육상 도약과 투척, 단거리 등의 대표선수들을 대상으로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여자 멀리뛰기의 라이벌인 J(24)와 K(30)는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통상 같은 종목 선수들끼리 방을 써야 하는데 J는 다른 방으로 가 100m 허들 선수와 함께 있었다. 트윈룸인데 K는 혼자, J 등은 셋이 쓰는 해프닝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곪아왔던 내분이 훈련시작과 동시에 방 배정을 둘러싸고 터져 나온 셈이다.
박영준 도약 코치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전지훈련 장소인 스포츠센터의 식당 한 켠에서 선수들과 미팅을 가졌다. 격한 말이 이어졌고 J도 불만을 표출했다. 결국 박 코치가 J의 뺨 머리 등을 여러 차례 구타하는 불미스러운 사고가 터졌다. 공개적인 장소였던 까닭에 스포츠클럽의 멤버인 호주인이 이를 봤고, 박 코치에게 여성을 폭행한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호주는 한국에 비해 여성 폭력에 대해 아주 엄격하다. 호주인은 센터 대표에게 폭력 행사자의 출입을 금지시켜달라는 요구와 함께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
폭행은 호주인 덕에 일단 무마됐다. 하지만 숙소로 옮겨진 후 2차 폭행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J뿐 아니라 타 종목 여자 선수들까지도 포함됐다. 구타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다른 코치들이 개입했고, 얼굴 등에 상처를 입은 여자선수 두 명은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이 분개했음은 물론이다.
다음날 스포츠센터의 대표는 한국 국가대표팀 관계자들을 불러 사건을 추궁했다. 경찰도 왔다. 간신히 ‘문화의 차이’라고 설명해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는 것은 막았지만 ‘폭력 행사자는 스포츠센터 내 숙소에서 절대 재울 수 없다’는 요구에 박 코치는 숙소를 외부의 모텔로 옮겨야 했다. 쫓겨난 것이다.
■ 당사자들의 해명
박영준 코치는 “일단 폭행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조건 잘못했다”며 사실을 시인했고 “육상연맹의 처벌을 달게 받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억울함도 함께 호소했다. “(나는) 육상 지도자이기에 앞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주변에 물어보면 알겠지만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선수로부터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고, 이를 팀 미팅 자리에서 체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폭행이나 구타가 아닌 체벌”이라고 강조했다.
또 사건이 특정 육상인 파벌에 의해 크게 과장됐다는 지적도 했다. “신고 때문에 경찰이 왔지만 수사나 그런 것은 아니고, 신고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형식상의 현장 방문이었다. 우리의 설명을 듣고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또 개인적으로 너무 억울하고 할 말이 많지만 혹시라도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 장래가 유망한 선수들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해 말을 아끼고 있다. 일부 육상인들이 침소봉대하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하소연했다. 자신이 대표팀을 맡은 2004년 이후 세 명의 선수가 각각 두 차례 총 여섯 차례나 한국 신기록을 세웠는데 이에 대한 시기와 음해가 심하다고 했다. 박 코치는 선수들과도 원만히 합의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현재 제주도에서 소속팀의 동계훈련에 참가하고 있는 J는 전화 인터뷰에서 “호주 사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라며 언급을 회피했다.
■ “터질 게 터졌다”
육상 대표팀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육상인은 “호주 사건은 터질 게 터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쇼트트랙이 끔찍한 파벌 다툼으로 국민들의 빈축을 샀지만 육상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선수들간, 그리고 지도자까지 섞인 파벌 싸움은 그나마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진 한국육상을 더욱 좀먹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팀 내에서 박영준 코치가 K와 아무개 남자선수에 대한 편애가 심했고, 이것으로 인해 선의의 경쟁은 사라진지 오래됐다고 한다. 이처럼 뿌리 깊은 갈등이 초기에 치료되지 않았고, 결국 외국에서 망신을 사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대한육상경기연맹이 문제가 터지면 쉬쉬하거나 미봉책으로 대응해 결국 화를 키운다는 지적도 많았다.
“연맹과 지도자는 물론이고, 선수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오히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어야 했다. 그래야 정말 정신차리고 새 출발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 젊은 육상 지도자의 진솔한 말이다.
■ ‘금메달감’ 선전에만 혈안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3개를 건진 한국은 이번에도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목표로 삼고 있다. (중략) 여자 멀리뛰기 등도 깜짝 금메달 기대주다.’(2006년 12월 6일 A 스포츠신문)
‘비인기 종목인 육상에서도 비인기 축에 드는 도약이 바야흐로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중략) 여자 넓이뛰기와 여자 세단뛰기에 출전하는 비장의 히든카드도 있다. (중략) 박영준 국가대표 도약코치는 “선수들이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어 도약에서만 최대한 금메달 3개도 도전해볼 만하다. 도약 사상 역대 최고 성적을 기대한다”고 말했다.’(2006년 11월 9일 B 스포츠신문)
도약 종목 내부는 극심한 내분에 최악의 폭력 사태까지 터지며 곪았는데 육상연맹과 언론은 정반대로 갔다. 오히려 기대감만 부풀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확실한 금 후보라던 김덕현은 동메달, 그리고 ‘비장의 히든카드’라는 J와 K는 자신의 최고 기록에 훨씬 못 미치는 참담한 기록으로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다.
심지어 호주 폭행사건에 대한 상벌위원회의 결정은 두 달이 훨씬 넘은 지난 1월 17일에야 나왔다. 상벌위원회에선 J에게 경고 조치를 내린 데 반해 박영준 코치에게는 자격정지 3개월과 육상연맹의 이사직을 박탈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상벌위원회의 결정 사항은 오는 26일 이사회를 통해 최종 마무리된다.
서상택 대한육상경기연맹 홍보이사는 “연맹으로서는 할 말이 없다. 일단 지도자가 잘못한 것은 확실하다. 연맹이 초기에 내분을 잘 조율하지 못했고 또 폭행 사건 이후 덮어둔 것도 일단 중요한 국제대회(도하 아시안게임)를 잘 치르기 위해서였다”라고 해명했다.
유병철 스포츠 전문 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