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장벽 쌓겠다”…국경 마을엔 구원 목소리
이와 관련, 최근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트럼프의 미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과연 누가, 그리고 왜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보도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슈테른>은 멕시코 국경지대의 작은 마을인 텍사스주 허드스페스 카운티를 찾았다.
공화당 최종 후보가 결정되는 7월 전당대회에서 트럼프를 몰아내려는 시나리오가 불거지고 있다. AP/연합뉴스
지금까지 미 선거전문가들이 분석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공통된 키워드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자 2. 중년 3. 저소득층 4. 백인 5.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소외감 6. ‘정부가 우리를 잊었다’는 박탈감.
바로 이런 키워드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는 곳이 바로 허드스페스라고 <슈테른>은 말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허드스페스를 찾은 <슈테른>은 비록 이곳이 인구수 3500명에 불과한 작은 카운티이지만 트럼프 돌풍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말했다. 가령 부동산재벌이자 정치 새내기인 트럼프가 왜 미국의 보수층에게 어필해 경선에서 연이어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소우주’와도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허드스페스 인구의 94%가 백인이라는 점이다. 또한 대부분의 주민들이 철도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혹은 조합원들인 까닭에 소득이 낮은 편이다. 지난 2001년에는 그나마 성업하던 쓰레기 하치장이 문을 닫자 전 지역사회가 충격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허드스페스 주민들은 부지런하고 근면하다. 거의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투잡을 갖고 있으며, 이는 보안관 역시 예외는 아니다. 16년 동안 허드스페스의 보안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빈 웨스트의 연봉은 4만 달러(약 4600만 원)가 채 안 된다. 때문에 그는 현재 화물트럭을 운전하는 일을 부업으로 삼고 있다. 보안관들의 열악한 재정 상태를 보완하기 위해서 그는 가령 공무용 차량은 밀수꾼들로부터 압류한 자동차를 경매에 붙여 조달하고 있으며, 텅 비어 있는 감방을 이웃 공동체에 하룻밤에 46달러(약 5만 원)에 임대해 수익을 챙기기도 한다.
하지만 웨스트의 이런 행위를 비난하는 지역 주민들은 아무도 없다. 특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주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들에게 ‘보수’란 특히 다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능한 정부의 개입은 적어야 하고’ ‘세금은 되도록 적게 내야 하며’ ‘대신 자유는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드스페스 주민들이 트럼프를 맹렬히 지지하는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약 158km에 걸쳐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마을이란 점이 바로 그렇다.
때문에 지금까지 멕시코 마약 밀매꾼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들로 마을이 시끄럽자 허드스페스 주민들은 고육지책 끝에 오래 전에 이미 국경을 따라 울타리를 세운 바 있다. 철골 구조물인 높이 6m의 이 울타리는 사실 시작점도 종착점도 없는 미완성인 상태다. 사유지 무단 침입이라는 논쟁과 더불어 재정 문제로 어느 지점에서 뚝 끊겨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구조물에 대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밀수꾼들은 땅굴을 파서 국경을 건너올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울타리를 빙 돌아서 건너오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오가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공약은 허드스페스 주민들에게는 구원의 손길과도 같았다. 주민들이 ‘쥬라기 공원 울타리’라고 부르는 이 무용지물의 울타리가 실제 장벽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이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도 했다. 실제 결국 이런 민심 덕분에 트럼프는 허드스페스에서 승리했고, 심지어 텍사스가 고향인 테드 크루즈마저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장벽을 세워서 달라지는 점은 얼마나 있을까. 이에 대해 웨스트 보안관은 “장벽이 10m 높아지면 불법 이민자들은 11m 높이의 사다리를 가지고 올 것이다”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아무리 장벽을 세워도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의 행렬을 막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트럼프의 공약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웨스트 보안관은 “그건 장벽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존중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은 우스꽝스런 이 울타리를 세우는 데 수백만 달러의 세금을 퍼붓는 우리를 조롱했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가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국경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장벽은 하나의 상징물이 될 것이다. 멕시코가 장벽 건설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한 트럼프의 주장은 훌륭하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워싱턴을 향해 ‘엿이나 먹어라!’라고 말하는 주민들의 명확한 의사 표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워싱턴, 즉 기성 정치인을 향한 불신 역시 트럼프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분모다. 허드스페스의 행정 중심지인 시에라 블랑카에 거주하는 개리 스카브로는 소를 키우는 농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은 “워싱턴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훌륭한 정치인들이 많다”이다. 다시 말해 정치인들이란 모름지기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들이란 것이다. 가령 그는 오바마 대통령을 ‘미국을 비겁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천국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싫어한다. 스카브로의 부인 역시 “배가 고프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사회복지 정책을 맹비난했다.
3200만 명의 무보험자들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안에 대해서도 스카브로는 “개인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부지런한 사람들의 지갑은 얇아지고, 무직자들은 요양소로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시스템은 망가졌다. 나는 트럼프 같은 기업가가 이 모든 걸 바꿔주리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기성 정치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 <슈테른>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믿음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은 아닐 수 있다고 꼬집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단지 다른 후보들(식상한 기성 정치인)보다 트럼프(새로운 정치 신인)를 조금 더 신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쟁쟁한 공화당 후보들이 트럼프 대항마로 세워질수록, 또 최종 후보가 결정되는 7월 전당대회에서 트럼프를 몰아내려는 시나리오가 불거질수록 되레 트럼프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화당 지도부가 트럼프를 저지하려는 ‘반란’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문은 트럼프 지지자들로 하여금 ‘워싱턴은 역시 음모의 소굴이다’라는 믿음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슈테른>은 따라서 트럼프는 ‘반발심의 후보’이지 ‘감동의 후보’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황당한 공약(예를 들어 세금 감면과 동시에 군비 확장)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며, 만일 트럼프가 정치 지도부 출신의 인물이었다면 아마 대부분의 보수층으로부터 지금과 같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밖에 허드스페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트럼프 지지자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백인 남성에 학력이 낮고, 소득이 적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공화당은 딜레마에 빠져 있기도 하다. 미국 유권자들 가운데 백인의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 반면,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의 비율은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와 같은 극우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극우 성향의 유권자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점점 더 과격해져왔다. 여기에는 공화당의 책임도 있다. 지금까지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경선 과정에서 극우 성향의 유권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들의 입맛에 맞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력을 다했다. 그런 다음 경선에서 승리한 후 본선에 진출해서는 중도로 방향을 선회하는 전략을 취했다. 궁극적인 목표가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본 극우 성향의 유권자들은 배신감을 느끼면서 격분하곤 했다.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는 시에라 블랑카의 ‘믿음의 교회’ 목사인 후안 카를로스 고메즈 역시 배신감을 느끼고 있긴 마찬가지다. 지역민들 사이에서 신앙심이 투철하기로 소문난 그는 “우리 보수층은 지난 수십 년간 매주 일요일 교회에 나오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는 살기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졌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하는 세상이 됐고, 마리화나도 합법이 됐다”고 말하면서 “워싱턴은 이 땅의 진실하고 충실한 국민들의 가치를 잊은 게 틀림없다”라고 비난했다.
텍사스주 포트워스 유세장에 몰린 트럼프 지지자들. 트럼프가 기성 정치인이 아니란 점이야말로 이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사진출처=슈테른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옛날이 좋았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허드스페스 주민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평생을 허드스페스에서 살아온 교사 출신의 앤 프랭클린(86)은 아직도 살기 좋았던 옛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그때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도시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미용실을 가기 위해서 종종 멕시코로 넘어가기도 했었다. 멕시코 사람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존중 받았었다”라고 회상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녀의 이웃집에 침입했던 도둑이 치즈와 소시지를 훔쳐 먹고는 재킷을 한 벌 갖고 달아났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다른 데 있었다. 도둑이 깨끗이 집안 청소를 하고, 심지어 설거지도 말끔하게 해놓고 간 것이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스페인어로 적힌 다음과 같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잘 먹고 갑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대로 재킷 값은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백인 천지인 허드스페스에도 더러 멕시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주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멕시코 이민자들을 가리켜 성폭행범이나 범죄자들로 지칭하는 트럼프의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놀랍게도 이들 역시 트럼프의 이런 태도에 대해 격분하지 않고 있다.
법원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루페 뎀프시(62)는 “트럼프의 말이 맞다. 아직도 국경 너머에서는 늘 총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법원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많은 멕시코 남자들이 그들의 부인을 어떻게 험하게 다루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멕시코에서 가정폭력은 만연해있다. 비록 내 부모님도 멕시코 출신이긴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 가운데 트럼프에게 모욕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트럼프는 우리가 부끄러워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슈테른>은 트럼프에게 열광하는 보수층들이 대통령에게 가장 바라는 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안보’라고 말했다. 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테러범들을 축출하고, 외국으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 지녀야 할 가장 큰 임무라는 것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