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좌절에 끙끙…이제 다시 도전할 차례”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또 다시 이 말이 빌미가 됐다. 지난 7월 25일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대한축구협회 등록팀(아마추어) 용품 전달식’에 클럽팀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했던 김영광(24·울산 현대). 22일 이란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에 성공한 이운재에 대한 인터뷰 부분에서 “마치 내가 골문 앞에 서서 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운재 형이 반드시 우승컵을 안고 돌아왔으면 한다”는 내용의 멘트가 ‘은퇴’와 ‘명예롭게’라는 양념이 첨가되면서 ‘선배 은퇴를 종용하는 배은망덕한 후배’로 또다시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골키퍼로선 처음으로 K-리그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차지한 김영광. 이번 아시안컵 본선에는 아쉽게 승선하지 못했지만 김영광은 올스타전 최다 득표라는 팬들의 선물을 가슴으로 받고 대표팀 탈락의 아픔을 털어낸 채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었다.
# 이운재와 김영광
“제가 원래 안티가 없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무슨 말만 하면 이상한 해석을 가한 네티즌들의 공격이 시작되니까 솔직히 말하는 게 무서워요.”
지난 26일,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울산의 현대축구단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영광은 전날 행사장에서 이운재와 관련된 멘트가 일부 네티즌들에 의해 ‘씹힌’ 데 대해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운재 형 입장이라면 어떨까를 생각해 봤죠. (이)을용이 형처럼 멋지게 은퇴할 것 같아요. 남들이 아쉬워할 때, 팬들이 더 있어주길 바랄 때, 손 흔들며 퇴장했을 겁니다. 물론 은퇴 여부는 본인 몫이고 제가 뭐라고 말할 입장은 전혀 아니에요. 단지 기자 분들이 아시안컵과 운재 형에 대해 물어봤고 전 그에 대해 제 생각을 얘기했을 뿐인데 조금 파장이 있었네요. 지금 이 말도 다시 불을 지피는 걸까요? 겁나요.”
어느 정도 연차가 있는 선수들은 질문에 대답을 해도 ‘알아서’ 정리하며 보기 좋은 모양새의 답변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젊은 선수들은 아예 ‘방송용’이거나 김영광처럼 ‘너무 솔직해서 탈’인 두 가지 형태로 갈린다. 김영광은 ‘리얼토크’란 타이틀에 걸맞은 인터뷰이(취재원)였고 그가 말한 내용을 나름대로 순화시켜서 쓰는 기자(파장을 염려한 탓)나 또는 걸러진 얘기를 전해 듣고서 여전히 ‘건방진’ ‘싸가지 없는’을 운운한다면 우리가 보수적이거나 편협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김영광은 ‘어렵게’ 솔직했다. 하지 않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힘들게 속내를 비추곤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이운재는 2006독일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김영광이 붙박이처럼 정해진 데 대해 가시 돋친 멘트를 서슴지 않았다. ‘김영광 말고도 실력있는 골키퍼는 많다’는 등 자극성 발언을 해왔기 때문이다.
“제 입장에선 운재 형의 그 발언이 섭섭했어요. 존경하고 닮고 싶어 했던 선배라 더더욱 그랬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운재 형의 입장도 이해가 돼요. 절 후계자로 인정했다면 많이 우쭐해졌겠죠. 더 분발하고 더 노력하라는 채찍과 관심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운재 형의 말도 일리가 있구요.”
# 팬 투표 1위와 대표팀 탈락
김영광은 골키퍼로선 처음으로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김진규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1, 2, 3차 투표에서 모두 김진규가 앞섰던 까닭에 자신이 1위를 차지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한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거든요. 아마 대표팀에서 떨어진 데 대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주위에선 농담 삼아 투표율 올리려고 제가 ‘애들’ 풀었다고 하던데, 하여튼 기분은 좋더라구요. 관심있게 봐 주시는 만큼 더욱 열심히 해야 되겠죠.”
김영광은 아시안컵 대표팀 탈락이라는 ‘현실’ 앞에서 굉장히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표팀 골키퍼는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고 어깨를 들썩였던 어리석음에 가슴을 치기도 했다.
▲ 무식하게 훈련만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김영광. 울산에서 그는 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골키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 ||
올해 초에 있었던 그리스와의 친선경기에서 김용대와 함께 대표팀에 뽑힌 김영광은 겨우내 훈련을 통해 컨디션이 상승세에 있는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 당일, 김용대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되자 심한 좌절을 맛 볼 수밖에 없었다. 부상과 부진으로 점철된 2006년의 악몽을 털고 개운하게 2007년을 시작하고 싶었던 그로선 이운재의 공백을 자신이 아닌 김용대가 맡게 되자 또 다시 불안한 기운을 느끼게 된 것이다.
“팀에서 뛰지 못하는 게 컸어요. 물론 제 탓이 컸겠지만 허정무 감독님 스타일에 제가 맞추질 못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절 봐주질 않는데 어떡하겠어요. 많이 힘들 때 울산으로 옮기게 돼 그나마 다행이었죠. 지금까지 계속 전남에 있었다면 여전히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김영광은 허정무 감독 밑에서 배운 건 ‘인내와 끈기’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한때 허 감독에 대해 서운한 감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마울 정도라고. 숱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게 해준 스승이기 때문이다.
# 골키퍼=도전과 안정
“골키퍼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순발력, 빠른 판단, 탄력 등등이 있는데.”
기자의 질문에 김영광은 2초도 걸리지 않고 ‘안정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골키퍼는 무조건 안정감이 있어야 해요. 모험 걸어서 욕먹느니 안정감 있게 끌고 가는 게 나아요. 하지만 성장하려면 욕을 먹어도 도전적인 게 필요해요. 예를 들어 센터링을 올릴 때 골대 앞에만 있는 골키퍼와 미리 예측하고 달려나가 잘라주는 골키퍼, 누가 더 뛰어난 골키퍼일까요? 물론 그러다 실수하면 욕먹는 건 마찬가지지만.”
김영광은 울산 현대로 이적 후 운동 생활에 많은 변화를 이뤘다고 말한다. 특히 이전 청소년대표팀에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김풍주 GK코치를 다시 만난 이후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안정감 있는 골키퍼로서의 변신을 꾀했다는 것.
“이름이 알려지고 유명세를 타면서 초심을 잃은 탓도 있었겠죠. 이전 무식하게 훈련에만 집중했던 김영광으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자친구랑도 헤어진 건가요?”
상당히 아픈 질문을 던졌다. 김영광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는 걸 확인하면서 최근 헤어진 것으로 알려진 여자친구(프로골퍼)와의 이별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전의 김진규처럼 김영광도 미니홈피에 여친과의 은밀하고 달콤 쌉싸름한 사진들을 올려놓고 여성팬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탓에 궁금증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서로 가야할 길이 다르다고 깨달은 거죠. 싸우면서 헤어진 건 아니에요. 어느 순간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느꼈고, 서로 잘 되길 바라며 보내주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이젠 (여자친구가) 생길 일도 없겠지만 만약 생긴다고 해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을 거예요. 저야 남자니까 괜찮다고 해도 여자 입장에선 많이 힘든 것 같아요. 홈피에 있는 사진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할 수밖에요.”
아무리 마음을 비운다고 해도 김영광의 꿈은 2010남아공월드컵 출전이다. 물론 한국대표팀이 본선 진출에 성공해야 가능한 시나리오지만 오랜 만에 마주한 김영광은 아픔과 깨달음, 그리고 성숙이란 단계를 거쳐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정했고 실천을 위해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사진기자의 이런저런 포즈 요구에 싫은 내색 없이 열심히 몸을 던지며 사진 촬영에 응한 김영광이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걸어가다가 이런 멘트로 사정없이 불쾌지수(?)를 끌어 올린다.
“그런데 누나, 이런 여자 없을까요? 우리가 스트레스 많이 받는 직업이잖아요. 특히 경기 전에는 더하겠죠? 그런 남자를 잘 이해해주고 뭐라고 다그치기 전에 배려하고 이해해주는…, 그런 마음 넓은 여자…. 난 그런 여자를 만나야 하는데, 아니 왜 그렇게 째려 보세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