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꿈꾸는 백수… 다음엔 지도자로 만나자
▲ 고정운(왼쪽)과 서정원.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1990년대 한국축구대표팀의 오른쪽과 왼쪽 날개를 맡아 폭발적인 돌파력과 파워 넘치는 스피드를 선보였던 두 명의 슈퍼스타가 만났다. 바로 ‘적토마’ 고정운(41)과 ‘날쌘돌이’ 서정원(37)이다. 황선홍, 홍명보를 축으로 노정윤, 하석주 등과 같이 90년대를 풍미한 두 ‘전직’ 스타플레이어들은 4년 만에 얼굴 보는 반가움을 싱거운 농담으로 대신하면서 부여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카리스마와 의리로 대변되는 고정운이 외향적이었다면 대표팀에서의 서정원은 성실+노력+모범생의 이미지였다. 최근 3개월 동안 브라질에서 축구 유학을 마치고 잠시 귀국한 고정운과 오스트리아 SV 리트에서 선수 생활을 모두 마치고 은퇴를 선언한 서정원은 자칭 ‘백수’라는 타이틀에서 공통점을 찾는다.
‘요즘’ 젊은 선수들이 듣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소설 같은 선수 생활과 에피소드들을 풀어내며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두 레전드들의 리얼 버라이어티 토크를 시작해본다.
‘주당 vs 사이다’의 수다
고정운은 술을 잘 마신다. 반면에 서정원은 술잔을 입에 대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선수 시절 고정운이 ‘화류계’의 중심에 있었다면 서정원은 ‘청교도’같은 삶을 지향했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 수밖에 없는, 아니 노는 ‘물’이 달랐던 선후배의 만남이라 어떤 그림들이 연출될지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 인터뷰는 진행자가 필요 없을 만큼 두 사람이 알아서 재미있게 끌고 나갔다.
고정운(고): 정말 오랜만에 얼굴 본다. 거기서(오스트리아) 완전 은퇴하고 온 거냐?
서정원(서): 네. 이제 저, 진짜 백수예요.
고: 은퇴하고 바로는 놀아도 괜찮아. 문제는 나지. 너랑 나랑은 백수의 차원이 다르다.
서: 뭐가 달라요. 똑같죠.
고: 나 봐라. 한국에 있으니까 눈치가 보여 자꾸 외국으로 기어 나가잖아.
서: 다음주에 영국으로 가신다구요? (황)선홍이 형도 보시겠네요? 10월 정도에 놀러갈게요.
고: 백수들끼리 모이면 뭐하냐?(웃음) 그래도 이런 시간들이 중요하긴 한 것 같아. 은퇴하고 바로 유학가는 거랑 코치 좀 하다가 나가는 거랑은 180도 다르더라. 나도 은퇴하고 곧장 독일로 건너가서 브레멘팀에서 8개월가량 있었는데 귀국할 때는 빈손으로 왔어. 선수 생활만 하다 갔으니 훈련과 경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구. 한마디로 분석이 안 된 거지.
서: 맞아요. 충분히 그럴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선 형이 부러워요. 프로팀에서 코치 생활을 해보셨으니까.
고: 난 이번에 브라질의 SC코린티안스팀에서 축구 수업을 받았는데 연습 과정과 경기 후 미팅, 감독과 선수들 미팅 등을 직접 참관하면서 볼 수 있었어. 성적이 좋은 팀이고 감독도 유명한 분이라 나한테는 너무 좋은 기회였지. 그런데 새삼 확인한 게 있어. 감독이나 선수들이 훈련할 때 엄청 진지하고 집중력이 뛰어난 데다 쉼 없이 반복과 반복을 거듭하면서 선수와 감독이 대화를 나눈다는 거야.
▲ 브라질 연수를 마치고 잠시 귀국한 고정운. 8월 15일 다시 영국으로 출국해 축구에 대한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다. | ||
고: 우리는 심리학이 (때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이걸로 갔잖아.
서: 그렇죠. ‘이거’ 아니면 이 ××야, 하고 윽박질렀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선수와 감독 간의 신뢰예요. 그게 정말 중요해요.
올림픽 대표팀과 홍명보
고: 너, 이번에 인기 폭발이었더라. 대전에서도 오라 하고 올림픽대표팀 코치로도 거론되고.
서: 어휴 형, 말 마세요. 제가 갈 자리가 아니었는데요 뭐. 누구보다 (홍)명보 형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고: 난 이번 일을 보면서 아무리 한국 축구가 발전했다고 해도 현실은 제자리라는 걸 절감했어. 아니, 언제까지 젊은 지도자에게 경험 타령만 할 거야? 도대체 그 경험은 어떻게 하는 거냐구. 시켜줘야 경험이 생기잖아.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꾸 써 줘야 경험이 느는 것 아닌가?
서: 솔직히 40세의 나이가 그리 빠른 거 아니잖아요. 지금 지도자로 활동하시는 선배님들 중에서 30대 초반에 은퇴해서 마흔 살에 감독하신 분들도 많아요. 외국은 더할 나위 없구요.
고: 일본대표팀에서 뛰었던 내 또래의 선수들 중에 J리그 감독된 친구들도 많다. 결국은 자리 싸움인 거야. 그런데 정원아! 이런 얘기 우리가 하는 게 좀 그렇다. 윗분들 보시면 혼날 얘기들이네…. (기자에게) 이번엔 가려서 잘 좀 정리해줘요.
서: 그래도 할 말은 해야죠. 전 지도자의 능력이 경험이 있고 없고로 판단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실수도, 실패도 다 경험해 봐야 하거든요. 젊은 지도자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야 명장도 되고 덕장도 나오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끔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고: 우리가 아무리 목소리 높이면 뭐하냐. 홍명보가 아니라 홍명보 할아버지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여론? 그건 물과 같아. 시간이 지나면 새롭게 채워지고 잊혀지니까. 정원아, 혹시 이번에 올림픽대표팀에서 간절히 널 원했다면 유학 포기하고 눌러 앉으려고 했었냐?
서: 전혀요. 정말 그런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물론 어떤 계기를 만들기 위해 테이프를 끊는 기회가 될 수는 있겠지만 당분간은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공부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코치도 쉽게 기회가 오는 게 아니지만요.
고: 넌 거기서 계속 눌러 살아라. 괜히 들어와서 나랑 밥그릇 싸움 하지 말구.
서: 형이 그런 말씀 하시니까 이상하다. 제가 형이랑 상대가 돼요?
고: 자식 여전하네. 립서비스는…하하.
대표팀에서의 첫 만남
서: 형이랑 저랑 언제 처음 만났죠? 89년도인가? 호주하고의 경기를 앞두고 소집됐을 때 제가 처음으로 대표팀에 들어갔을 거예요. 그때 전 고려대 소속이었고 형은 일화에서 뛰었잖아요. 전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보다 형의 플레이를 유심히 관찰했어요. 사이드 맡은 선수들 중에서도 형은 색깔이 있었다니까.
고: 야, 임마! 빨간 옷(유니폼) 입고 있었으니까 색깔이 있어 보였겠지.
서: 아니에요. 형은 사이드에서 가지고 있는 무기가 많았어요. 형은 단 한 번도 일자로 센터링한 적이 없었어요. 윙을 보면서 상대 선수들을 제치고 감아서 센터링을 하니까 센터링이 많이 올라왔어요. 지금도 인터넷 들어가 보면 팬들이 형이 왼쪽에 서고 내가 오른쪽에 섰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고 말하더라구요.
▲ 오스트리아에서 선수 생활 은퇴 후 잠시 쉬고 있는 서정원. 조만간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유럽 축구를 순회할 예정이다. | ||
서: 형은 술 마시면서도 잘 했잖아요.(웃음)
고: 야, 야! 인터뷰 중이다. 그런 말은 좀 자제하자. 너랑 나랑은 ‘과’가 틀렸어. 술도 못 마시고 단체로 룸살롱에 가도 넌 사이다 마시며 촌놈처럼 멀뚱거리고 앉아 있었잖아.
서: 하하 저도 (술)먹고 싶어요. 배우고도 싶고. 한두 잔은 해야 선후배들과 어울리고 속 깊은 얘기도 나누는데 그런 걸 못해 많이 아쉬워요.
고: 정원아, 난 <일요신문>이랑 인터뷰하기로 약속하면 며칠 전부터 등산하면서 체력 훈련에 들어간다. 오늘 이 술은 나랑 기자랑 다 마셔야 할 것 같은데 등산을 못 갔다 왔더니 좀 껄쩍지근하네.
서: 두 분이 부럽습니다. 저도 같이 마시고 싶은데 소주 한잔에 기절하는 스타일이라…. 형, 전요,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 갔을 때요. (정)광석이랑 저랑 잡다한 일들로 힘들어 죽겠는데 (노)정윤이가 뺀질거리면서 일을 안 했잖아요. 그때 형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윤이한테 막 뭐라 하셨어요. 최고 말단이 뺀질댄다고.
고: 나중에 (홍)명보랑 (황)선홍이랑 따로 불러서 나한테 엄청 혼났다. 후배들 관리 못했다고.
서: 전 내심 고소했어요. 같이 일해야 하는데 안 하니까 열 받잖아요. 형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형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셨어요.
고: 정원아,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그렇게 했다간 당장 쫓겨나. 선배가 후배에게 잘 보여야 하는 세상이라니까. 나도 처음엔 그런 게 남자답고 좋은 거라고 믿었는데 은퇴하고 사회 생활해 보니까 절대 좋은 거 아니더라. 그냥 주는 밥 먹고 고맙습니다 해야 해.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고정운은 코치 시절, 소위 잘 나가는 선수들의 예의 없음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곁들이며 생생한 현장 분위기를 전달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서정원은 “와, 상상이 안 가요. 그걸 어떻게 그냥 두고 봐요?”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감독이나 코치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던 이전 생활과 지금의 선수 생활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마디 쏘아댔다.
“제가 (박)지성이나 (이)영표, (설)기현이를 왜 좋아하는지 아세요? 걔네들은 실력도 좋은데 인성도 훌륭하다는 거예요. 축구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됐다는 거죠. 예절이 중요해요. 아무리 잘 나가는 스타라고 해도 매너 없는 선수는 단명해요. 두고 보세요. 제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아무리 ‘과’가 틀렸어도 이런 선후배 관계라면 두고두고 인연 이어가고 의지하고 보태가면서 축구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황선홍, 홍명보, 고정운, 서정원…. 이들이 축구 지도자로 자리를 잡아갈 즈음에는 우리나라 축구가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알딸딸한 술 기운 속에서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기대가 된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