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아닌 나라빚…“국민에 부담 전가 꼼수”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최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간담회를 열고 “국책은행 출자는 통상 재정이 하지만 경제정책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며 “우선 순위가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 경제시스템에서 각국 중앙은행의 역할은 화폐를 발행하고 통화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 은행처럼 예금을 받거나 대출을 해주는 등의 업무를 하지 않는다. 다만 긴급한 경우에는 시중은행이나 기업에 단기로 돈을 빌려줄 수는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한국은행은 금융시장 안정 대책자금을 지원했고, 1999년 대우사태 이후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국공채와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해 유동성을 공급했다”면서 “중요한 것은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에도 자본을 댄 게 아니라 돈을 빌려 주는 것에 그쳤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 구조조정은 정부가 세금으로 조성된 돈을 투입하는 ‘재정’이 맡는 게 경제의 정석이다. 그런데 청와대와 정부는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명분으로 통화정책기관인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국책은행에 공급하고, 이를 재원으로 기업 부실을 메우자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학자 출신인 유 부총리도 경제정석을 잘 알면서 ‘변칙도 필요하다’며 배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발권력 동원 배경으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이 법의 요건에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유 부총리는 최근 국회에서 언론과 만나 “(법적으로) 경기가 아주 나빠지거나 대량실업이 있을 때는 추경을 할 수 있다”며 “구조조정 때문에 경기가 엄청나게 나빠진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을 지켜야 하니까 추경 요건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현행법상 한국은행의 국책은행 출자도 ‘위법’이다. 기존 법을 지키느라 추경을 못한다면서 기존 법을 뜯어고쳐서라도 한국은행 돈을 끌어다 쓰겠다는 논리인 셈이다. 국내 경제학자들이 대부분 이 같은 정부의 방안을 우려하고 있는 가운데 해외에서도 걱정스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럽 최대은행인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프레드릭 뉴먼 아태지역 리서치센터 공동대표는 이달 초 서울 HSBC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부가 구상 중인) 한국형 양적완화는 미국이나 일본, 유럽과 달리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국책은행 대차대조표를 개선하는 것은 재정정책이지 통화정책과 무관하다”며 “중앙은행에 손을 대는 것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 해외에서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는 데 엄격한 통제장치를 두고 있다. 미국의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는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만큼만 새로운 돈을 찍어낼 수 있다. 즉 중앙은행의 발권은 곧 정부 부채의 증가다.
영국의 시스템을 따른 홍콩도 3개의 상업은행에서 지폐를 발행한다. 정부의 무분별한 발권으로 인한 통화량 팽창을 막기 위해서다. 시중은행들도 발권하려면 발행할 액수를 정해진 비율의 미국 달러로 홍콩 금융관리국에 미리 지불해야 한다. 역시 발권력은 갖되 마음대로 돈을 찍지 못하도록 한 장치다.
언뜻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내는 것은 ‘공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한은은 늘어난 유동성을 조절하기 위해 대출금액에 상응하는 규모의 통화안정채권을 발행해야 한다. 국가부채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한국은행도 엄연한 국가기관이니만큼 사실상 부채다. 돈을 찍어 돈을 갚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이번 한국판 양적완화가 기업 구조조정에만 초점이 맞춰져 통화량이나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발권력은 이미 이명박 정부 이후 계속 정부 정책이나 재정수요에 동원되고 있다. 정부가 쓸 돈이 부족해 빚을 더 내려면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발권한도는 금융통화위원 4명 이상만 동의하면 간단히 이뤄진다.
2010년 8조 5000억 원이던 한국은행의 발권한도는 5년 만에 20조 원 한도로 급증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 폭 증가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정부 재정에서 구조조정 재원을 마련하면 나라살림에 당장 큰 부담이 생긴다. 다음 대선을 위해서는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곳에 돈을 써야 하는데,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게 표를 얻는 일과 거리가 멀다. 결국 티 안 나는 데 재정 투입하는 대신, 그냥 한국은행에서 돈을 찍어서 조달하는 게 묘수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야당의 반대, 심지어 여당인 새누리당 내에서도 정부의 ‘한국은행 동원령’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미미하자 기획재정부는 또 다른 묘수를 끌어냈다. 코코본드(contingent convertible bond)다. 코코본드는 유사시 투자 원금이 주식으로 강제 전환되거나 상각된다는 조건이 붙은 회사채다. 역(逆)전환사채, 의무전환사채(강제전환사채) 등이 있다. 돈을 대는 측이 돌려받을지 아닐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리는 쪽에서 갚을지 말지 결정한다. 주주로서 권리는 없는 반면 주주로서 책임은 지는 셈이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결국 정부는 야당의 반대와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에서 돈을 찍어 기업 구조조정에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며 “얼핏 한국은행의 반대가 걸림돌인 듯 보이지만 대통령이 대부분 임명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하면 한은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그동안 기업 구조조정과 기업 지원을 맡아온 국책은행의 잘못에 대한 문책이 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부실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대우조선해양(대우조선)은 외환위기 이후 줄곧 산업은행 관리 아래 있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등 해운 빅2도 수년 전부터 산업은행과 채권단의 관리 대상이었다. 하지만 대우조선은 대규모 분식회계가 이뤄졌고,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경영은 더욱 악화됐다.
대우조선의 대주주이자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채권단의 대표격인 산업은행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일요신문DB
산업은행은 대우조선의 대주주이고, 수출입은행은 최대 채권은행이다. 두 국책은행은 재무제표에 대우조선에 대출해 준 12조 9903억 원(산업은행 4조 원, 수출입은행 8조 9903억 원)을 정상채권으로 처리했다.
반면 민간신용평가사인 한국신용평가는 지난해 말 대우조선의 회사채 등급을 투자등급 마지노선인 BBB에서 투기등급인 BB+로 내렸다. 대우조선이 5조 원대 손실을 뒤늦게 공개한 데 따른 조치며 대우조선 회사채를 사지 말라는 메시지다. 한국신용평가 관계자는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의 자금 지원 결정에도 불구하고 해양플랜트 추가 손실 가능성 등 경영 불확실성이 여전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투자등급에서 투기등급으로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채권자는 해당 채권의 손실 가능성을 장부에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두 국책은행은 이를 정상채권으로 유지하며 손실 가능성에 따른 충당금을 쌓지 않았다.
수출입은행은 지난해 216억 원의 흑자(당기순이익)를 기록했다. 산업은행은 1조 9000억 원의 적자를 냈지만 대우조선에 대한 충당금을 쌓지 않아 그나마 적자 규모를 대폭 줄였다.
산업은행의 지난해 평균 연봉은 9435만 원, 수출입은행은 9240만 원으로 321개 공공기관 중 나란히 10위권 안팎을 기록했다. 또 두 국책은행이 ‘정상기업’이라고 인정한 대우조선은 지난해 하반기 직원 1명당 900만 원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그간 산업은행 퇴직자들은 대우조선에 낙하산 임원으로 재취업해 억대 연봉을 받거나 고문을 맡아 사무실과 차량을 받았다.
부실채권 대비 충당금 적립률은 산업은행 78.6%, 수출입은행 79.8%로 시중은행 평균(143%)에 한참 못 미친다. 충당금이 부실채권 규모보다 작아 자력으론 부실채권을 털어낼 수 없다는 얘기다. 한국은행이 찍어낸 돈은 결국 두 국책은행과 이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기업들에 흘러갈 수밖에 없다.
삼성선물에 따르면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이 시중은행 수준의 충당금을 적립하려면 7조 2730억 원(산업은행 4조 7450억 원, 수출입은행 2조 5280억 원)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 여기에 대우조선의 대출금을 부실채권으로 분류하면 수조 원의 충당금을 더 적립해야 한다.
부실기업 경영진에 대한 책임 논란도 커지고 있다. 대우조선은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이 경영진 인사권을 행사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최은영 회장과 현정은 회장이 이끌었지만 경영책임은 미미하다. 최 회장은 이미 2014년에 대한항공에 경영권을 넘겼다는 이유로 사재를 단 한 푼도 투입하지 않고 있다. 현 회장의 사재출연액은 단 300억 원에 불과하다.
결국 경영책임을 진 오너는 발을 빼고, 경영을 감독해야 할 국책은행 등 채권단은 책임을 회피하는 모양새다. 이로 인한 부실은 중앙은행의 발권, 결국엔 국민이 부담해야 할 나라빚으로 메워야 하는 셈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