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까진 야구에 ‘마침표’ 찍을 수 없어”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빈볼과 욕설로 파문을 일으킨 ‘윤길현 사태’에 대한 책임과 사과 차원에서 한 경기 결장했던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 그날 SK는 두산을 상대로 0-8로 대패했지만 다음날 감독이 돌아온 이후부턴 6월 26일 현재, 6연승을 내달리고 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에 이어 올해 정규리그에서도 8개 구단 가운데 처음으로 50승 고지에 오르며 1위 자리 굳히기에 들어간 SK. 성적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김성근 감독의 야구 스타일 때문인지 SK는 유난히 이런저런 비난과 비판, 견제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다.
지난 6월 24일 롯데와의 마산 경기를 앞두고 마산의 한 호텔에서 만난 김성근 감독은 ‘on(보도)’과 ‘off(비보도)’를 오가며 가슴에 담아둔 얘기들을 하나둘씩 꺼내 보였다.
지난 19일 두산전을 앞두고 대쪽같은 성격의 그가 기자들 앞에서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봤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66세의 프로야구 최고령 감독이 고개를 숙이기까지엔 많은 사연들이 있었지만 문제를 일으킨 자식을 위해 아버지가 앞장서 ‘죄송하다’며 사과를 한 부분은 성난 야구팬들과 누리꾼들을 일시에 잠재울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에게 그 날의 얘기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가슴 아팠던 건 나 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내 아이들과 팀 전체가 화살받이가 됐다는 부분이었지. 다른 일 같았으면 혼자 머리 깎고 자숙하는 시간을 보냈겠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더라고. 감독으로선 야구장을 떠나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그래도 새끼 아플 때 ‘오야’가 빨리 나서줘야 한다고 봤고 어떻게 해서든 매듭을 짓고 싶었어요. 숙소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는데 자꾸 감독의 빈 자리를 비춰주니까 기분이 이상해지고 뭔가 아프기도, 슬프기도 하더라고.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했을지도 몰라.”
‘어떻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었다.
“극단적인 상황? 야구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테고 최악의 상황까지 갔더라면 옷을 벗었을지도 몰라. 비난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김성근을, SK를 오해하는 시선들이 너무 안타깝고 답답했던 거겠지. 이렇게 살아온 게 억울하기도 하고, 뭐랄까 마음이 아주 무거워졌어.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이야.”
김성근 감독은 자신을 둘러싼 선입견에 대해서도 ‘왜 나에 대해선 유독 편견들이 많은지 모르겠다’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줬다.
“어제(월요일) 우리 집 아들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 사람들이 날 오해하는 게 많다고.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왜 날 오해할까? 난 그렇게 복잡한 인간이 아닌데, 무지 단순한데, 말을 돌려서 얘기할 줄 모르는데 왜 오해를 할까? 야구는 복잡하게 할지 몰라도 인생살이는 복잡하지 않아요. 나처럼 단순하게 사는 사람도 없을 거야. 김성근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미리 색안경 끼고 보는 것 같아. 그런 점에선 미디어의 역할도 중요해. 윤길현 문제도 야구장 안에서 일어난 일을 왜 자꾸 사건화시키는지 모르겠더라고. 선수의 잘못을 지적하고 날카로운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해야지. 하지만 선수를 무조건 몰아세우는 건 야구 발전 측면에서 결코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야.”
김성근 감독은 SK 야구가 한마디로 ‘재미없다’ ‘너무 이기는 경기만 추구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며 강변했다.
“왜 우리 야구가 재미없다고 하지? 왜 9회에 이기면서도 투수를 바꿨다고 비난 받아야 하는 거지? 억울하면 오기 갖고 우릴 딛고 일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잖아.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 대해 비난하는 건 약자나 하는 짓이야. 잔디가 왜 잔디야?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가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잖아. SK는 포기하는 걸 몰라요. 어떤 상황에서도, 0-10으로 지고 있어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으로 게임을 풀어간다고. 50승? 이건 과거의 숫자일 뿐이야. 난 7할에도 관심 없어요. 오로지 어떻게 해서든 코나미컵에 가고 싶을 뿐이야. 그래서 일본 우승팀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고 싶은 마음만 있다고. 일본 친구들이 SK 야구하는 걸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해. 스피드 있고 파닥파닥거리며 뛰어다닌다고. 뭐가 재미없다는 거야? 직접 와서 보고 느낀 다음에 얘기하라고 해. 일주일만 같이 우리가 훈련하는 데 들어와서 보라고 말하고 싶어.”
SK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휴식일이나 다름없는 월요일에도 훈련을 한다. 게임이 있는 날에는 11시에 일찌감치 야구장으로 나온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1위란 숫자에 현혹되지 않고, 코나미컵을 향해 끝없이 훈련을 반복한 것이 지칠 줄 모르는 SK 야구의 힘으로 작용되고 있다.
시즌 초 김성근 감독은 7개팀 사령탑의 ‘공공의 적’으로 내몰렸다. 감독들마다 김 감독의 야구 스타일에 대해 기자를 매개체 삼아 핑퐁식 대답을 주고받았다. 중심보다는 변방, 스포트라이트보다는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를 풍겨온 김성근 감독은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김성근 감독은 꼴찌를 할 때나 1위를 할 때나 쌍방울, LG 감독 시절이나 지금의 SK나 항상 ‘고독’ ‘외로움’이란 단어들과 함께 해왔다. 8명의 감독들이 서 있으면 그 혼자 외톨이처럼 보였다. 이유는 그가 재일교포 출신이란 뿌리 때문이리라. 그러나 김 감독은 자신의 출신 성분이 지도자로서의 김성근을 혹독하게 단련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쓰러진다고 가정할 때 과연 누가 와 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아무도 안 올 거라고. 인간은 혼자 왔다가 혼자 사라지는 거야. 그렇다면 자기밖에 믿을 사람이 없잖아. 난 내 힘을 키우려고 애썼어. 남하고 타협하고 어울려 다니지 않았다고. 내 주위에 사람을 두지 못한 건 내 불행이야. 그렇다고 후회되진 않아. 재일교포 출신이라 기댈 사람이 없잖아. 내가 힘이 떨어지면 세상 끝이란 신념으로 산 거지.”
김 감독은 시즌 초 롯데전에서 2연패 당한 후 1승3패로 내몰리자 부산에서 혼자 맥주 5병을 20분 만에 ‘원샷’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땐 정말 큰일 났다 싶더라고. 이래가지곤 안 되겠다 싶었고. 우린 지옥같은 훈련을 소화했는데, 내가 봐도 우리 애들이 불쌍할 정도로 열심히 훈련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오면 말이 안 된다 싶었지. 그날 술 마시면서도 머릿속은 아이템을 구상하느라 복잡했어. 엄청 열받았거든. 그렇다고 로이스터를 욕하면 안 되잖아. 못하는 우리가 답답한 거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그게 내 화두였고 밤을 새우며 궁리한 끝에 박경완을 빼고 정상호를 투입시킨 거야. 바꿔주니까 새로운 힘이 생기더라고.”
김 감독은 2연패한 그날 밤의 상황을 ‘몸부림’이란 단어로 설명했다.
SK는 4명의 일본인 코치를 쓰고 있다. 이에 대해 야구계의 시각은 극명하게 갈린다. 일부에선 김성근 감독이 일본인 코치를 중요시 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코치들이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소리도 들린다. 김 감독은 이런 지적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히딩크 감독이나 로이스터 감독이 와서 우리 감독들 자리가 빼앗겼다고 생각하나? 능력있는 코치, 감독을 데리고 와서 선수들 실력을 향상시킨다면 일본은 어떻고 중국, 미국은 어떠한가. 일본인 코치 때문에 한국 코치들의 입지가 작아진다? 그런 논리는 너무 슬픈 얘기야. 억울하면 공부하라고 해. 내가 지바 롯데에서 2년 동안 생활하며 깨달은 게 있었어. 왜 진작 못 나왔을까. LG에서 잘리고 야인 생활할 때 친구들이 외국 나가라고 충고했지만 난 한국 야구에서도 배울 게 많다며 받아들이지 않았거든. 밖에 나가보니까 난 우물 안 개구리였더라고. 얼마나 후회되는 데. 한국 야구라고 한국 사람들하고만 야구할 거냐고요?”
김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무승부를 없애고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취지로 만든 ‘무제한 연장제’ ‘끝장 승부’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경기를 하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지난 번 SK도 히어로즈전에서 11시47분에 경기가 끝났다고. 우린 더 이상 내보낼 투수가 없었어. 상대가 빈틈을 보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거지. 끝장 승부는 선수들에게 ‘폭력’이나 마찬가지야. 4시 정도에 가볍게 식사를 하고 경기에 들어갔다가 밤 12시까지 물만 마시면서 야구한 셈이라고. 선수들이 얼마나 힘들겠나. 하품하고 졸립고 경기에 집중이 되느냔 말이야. 그런 제안을 한 사장이나 단장이 직접 벤치에 와서 12시까지 경기하는 걸 지켜봤으면 좋겠어.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걸 봐야 한다고.”
김 감독은 자신의 야구 인생에 ‘마침표’는 없다고 덧붙였다. 자신은 아직도 야구에 관한 한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런 멘트로 감동을 전한다.
“이 기자, 야구란 게 참 재밌어. 해도 해도 새롭거든. 아무리 파고 들어도 또 새로운 게 나오는 거야. 이러니 어떻게 야구에 마침표가 있겠어. 내가 죽어도 그 ‘마침표’는 찍을 수 없을 거야.”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걸, 포기보단 기다림을, 만족보단 불만을 갖고 살아가길 바라는 김성근 감독. 야구계의 많은 시선들은 그가 너무 많은 걸 가졌고 이쯤이면 좀 여유있게 베풀며 살기를 바라지만 승부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는 ‘여유’가 생길 때 김성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