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도 가정도 잠시 땀방울에 묻었다
▲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아테네올림픽 핸드볼 결승전 모습. 접전 끝에 은메달에 머물렀던 ‘아줌마 팀’이 금메달에 다시 도전한다. | ||
# 귀화, 그 새로운 출발
6개월 전 일이다. 중국 광저우에서 세계 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한국대표팀에 새로운 여자 선수가 눈에 띄었다.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나고 자란 탕나, 그러나 지금은 어엿한 한국인이 된 당예서였다.
허약한 체질 개선을 위해 6세 때 처음 탁구라켓을 잡은 당예서. 탁구 인구만 1억 명에 달한다는 중국에서 전국청소년선수권 우승을 차지했고, 재능을 인정받아 중학교를 마친 뒤 국가대표 양성의 산실인 베이징 올림픽선수촌에서 줄곧 생활했다. 청소년대표와 성인대표 25인에 뽑히며 4년 동안 활약했지만 폭 넓은 선수층 탓에 올림픽 진출의 꿈은 멀기만 했다. 당시 중국에는 올림픽대표선발전이 없었다. 지도자에게 선택받은 3명만이 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당예서, 아니 탕나는 1999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근 8년 동안 태극마크는 둘째치고 한국 국적조차 취득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귀화하기 위해 5년간 한국에 머무르며 귀화시험을 쳐야 한다는 사실도 한국에 온 지 3년 뒤에 알았다. 그러나 소속팀 대한항공의 도움은 헌신적이었다. 강희찬 감독은 8년 동안 당예서 옆을 지키며 친오빠처럼 그를 도왔다. 지난해 9월에 치른 귀화시험 통과를 위해 강 감독은 자신의 부인을 당예서의 개인교사로 붙였다.
당예서는 2006년 3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남편은 중국에서 부동산업을 제법 크게 하는 잘나가는 사업가다. 하지만 당예서는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3년 동안 남편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
국적까지 바꿔가며, 남편과의 신혼 생활도 포기해가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올림픽 출전. 그 평생의 꿈이 이제 눈앞에 펼쳐졌다. 이번 올림픽에서 당예서가 중국 선수와 맞대결을 펼치게 된다면 중국 언론의 공격은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당예서는 의연하다. 이번 올림픽의 목표대로 개인·단체전에서 모두 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함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당예서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어렵다는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 바늘구멍보다 더 좁은 관문을 뚫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던 국가대표의 꿈을 멀리 바다 건너에서 다시 펼쳐 나가는 주인공들도 있다.
지난 2004년까지 대구중구청 남자 양궁팀에서 활을 잡았던 김하늘. 그는 감독인 아버지 김덕용 씨 밑에서 착실하게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유망주였다. 하지만 국내 대표 선발전을 뚫기는 어려웠다.
이런 김하늘에게 호주양궁협회가 귀화를 제안해왔다. 고민 끝에 2005년 초 호주로 건너갔고, 2006년 6월 시민권을 받았다. 2006년부터 호주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오교문 감독과 함께한 김하늘은 호주 대표선발전을 통과하며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다.
일본 양궁 대표팀에는 하야카와 나미(早川浪)가 있다. 일본에서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지난 2004년 대한해협을 건너간 엄혜랑이다. 전북체고와 한국토지공사에서 활을 쏜 엄혜랑은 2005년 일본체대 체육학과에 입학하며 다시 활을 잡았고 이듬해 일본 국적을 취득, 지난해부터 일본 대표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국제양궁연맹(FITA)은 국적을 바꾼 뒤 1년간은 메이저 대회에 출전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엄혜랑은 터키 이즈미르에서 열린 세계실내선수권대회 개인전에서 일본 선수로는 처음으로 우승하기도 했다.
▲ 감금화와 오은석(가운데), 맨 오른쪽은 양태영. | ||
핸드볼 여자 국가대표팀의 명 수문장 오영란(36)은 지난해 11월 말 뜻 깊은 하루를 보냈다. 12월 6일은 결혼 5년 만에 가진 딸 서희의 생일. 그러나 오영란은 딸이 처음으로 맞는 생일, 즉 돌잔치를 2주 정도 앞당겨서 했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1월 말 출국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오영란은 “한창 예쁜 짓을 많이 할 때인데 자주 못 봐서 너무 아쉬워요”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런 오영란을 따스하게 감싸는 이는 오영란의 남편이자 남자 핸드볼 대표팀의 골키퍼 강일구(32)다. 어린 시절부터 코트에서 자주 만나던 두 사람은 시드니올림픽이 열린 2000년 연애를 시작했고 2년 뒤 결혼했다.
이 부부가 올림픽에 함께 참가하는 것은 결혼 전 연애 시절이었던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8년 만이다. 올림픽 역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여정을 거쳐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거머쥔 핸드볼 대표팀. 그만큼 부부가 이번 올림픽에 걸고 있는 열정은 뜨겁다.
부부의 정은 유도장에서도 꽃을 피운다. 유도 남자 90㎏급 최선호(31·수원시청)와 유도 여자대표팀의 이복희 트레이너(30)도 부부가 함께 베이징에 입성한다. 용인대 선후배인 이들은 지난해 말 결혼에 골인했고 최선호는 이 여세(?)를 몰아 8년 만에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아테네대회에서 여자 63㎏급에 출전했던 이복희는 이번엔 지도자로 후배들을 돕는다.
부부는 아니지만 펜싱 대표팀에는 연인 커플이 있다. 남녀 사브르 개인전에 출전하는 오은석(25·상무)과 김금화(26·익산시청)는 오랜 연인 사이. 2003년 미국 뉴욕 전지훈련부터 연인 사이로 발전한 이들은 현재 오은석이 세계랭킹 12위, 김금화가 15위에 올라 있다. 펜싱 대표팀의 간판 남현희(27·서울시청)는 오랜 연인 원우영의 응원을 받으며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한다. 원우영이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해 동반 출전의 꿈은 무산됐지만 남현희는 애인의 몫까지 다하고 오겠다는 각오다.
남자 핸드볼대표팀의 윤경신(35·두산)과 윤경민(29·하나은행)은 형제 사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일곱 번이나 득점왕에 올랐던 윤경신은 이번이 네 번째 올림픽 도전이다. 동생 경민과 함께 올림픽에 나서는 것도 어느덧 세 번째.
체조 남자대표팀의 이주형 감독(35)과 이장형 코치(34)는 친형제가 대표팀 코칭스태프를 책임지는 케이스. 이들이 함께 대표팀을 이끈 지난해 독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자 단체전 5위, 평행봉 금메달(김대은) 등의 성과를 냈다. 레슬링 국가대표 그레코로만형 코치 김인섭(35)과 84㎏급에 출전하는 김정섭(33)도 레슬링계를 대표하는 형제다.
▲ 위쪽은 4년 전 유도 은메달리스트 장성호. 지난 7월 태릉선수촌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포즈를 취한 남녀 양궁 선수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국 태권도 기대주인 남자 68㎏급의 손태진(20·삼성에스원)이 올림픽 예선에서 보여준 투혼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다.
1회전 부전승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나아가던 손태진은 야코모 가르시아(도미니카공화국)와 4회전(16강) 대결 끝에 팔꿈치가 탈구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응급조치를 받고 다시 경기에 나선 손태진은 6-3으로 승리, 8강에 올랐지만 더 이상의 출전은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8강 상대는 2005년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 마크 로페스(미국)였다. 대회 체급별 3위 선수의 국가에까지만 주어지는 올림픽 출전 쿼터 획득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손태진은 주저앉지 않았다. 3라운드까지 4-4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서든데스로 진행되는 연장전에서 종료 4초 전 회심의 오른발 몸통차기를 성공시키며 로페스를 무릎 꿇렸다. 이어 준결승에서 멕시코의 이듈리오 이슬라스(멕시코)를 2-0으로 따돌렸고, 결승에서도 현란한 발차기로 게슬러 비에라 아브레유(쿠바)마저 4-1로 꺾고 1위에 올랐다. 손태진이 ‘맨체스터의 영웅’으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사격 여자 공기권총의 메달 기대주 이호림(20·한국체대) 역시 4년 전 아픈 기억이 있다. 강초현이 은메달을 따며 국민스타로 떠올랐던 2000년 사격을 시작한 이호림은 천부적인 재능을 과시하며 16세 때인 2004년 여자 권총계의 간판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테네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줄곧 선두를 달리던 이호림은 막판 어이없는 실수로 올림픽 출전의 꿈을 4년 뒤로 미뤄야만 했다. 아테네올림픽 사격 경기를 TV로도 지켜보지 못했다는 그는 이번 베이징에서 그 아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계획이다.
4년 전 아테네올림픽에서 나란히 은메달을 목에 건 유도 100kg급의 장성호(30)와 체조 남자 평행봉의 양태영(28), 그리고 아테네 최고의 명승부를 연출하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출했던 여자 핸드볼은 이번 올림픽에서 그 한을 반드시 풀어야 한다. 장성호는 각종 국제 대회에서 100kg급 우승을 수없이 차지하며 체급의 최강자로 군림해왔지만 아테네올림픽에서는 일본의 스즈키 게이지에게 아쉽게 패하며 금메달을 양보해야 했다. 장성호는 스즈키에게 반드시 빚을 갚고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심판의 명백한 오심으로 금메달을 도둑 맞았던 양태영 역시 한풀이에 나선다. 당시 양태영의 금메달을 가져갔던 미국의 폴 햄이 부상으로 불참을 선언했지만 양태영은 그와 상관없이 자신이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각오다.
무려 세 차례의 올림픽 예선을 치르며 참으로 먼 길을 돌아온 여자 핸드볼대표팀. 평균 연령 34세의 ‘아줌마 팀’이 된 핸드볼팀은 이번에야 말로 아테네의 한을 풀고 ‘우생순’을 재현하겠다고 외치고 있다.
허재원 한국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