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도 트로피도 부적절한 ‘주물럭’?
▲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A 씨(왼쪽)와 이번 대회 우승자 D 씨. | ||
#협박 성추행 그리고 소송
지난 8월 5일 만난 A 선수는 40대 중반으로 세 자녀의 엄마였지만 아시아선수권 준우승에 어울릴 만큼 탄탄한 몸매와 깔끔한 외모가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철저하게 운동을 하면 저런 몸을 유지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선수로 활동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10여 년 전 아이를 출산한 후 취미로 시작한 운동이 보디빌딩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고, 2년여 전인 2006년에 선수로 데뷔했다. A 선수는 학창시절 촉망받는 육상선수였고 또 워낙 독하게 운동을 한 까닭에 데뷔 때부터 한국 여자 보디빌딩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2007, 2008년 전국대회를 휩쓸었고 가볍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특히 올해는 체급을 통틀어 최고의 선수인 ‘미즈코리아’ 영순위 후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이처럼 강인한 여자선수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눈물부터 보였다.
A 선수의 호소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지난 7월 18일 저녁 홍콩의 한 호텔. ‘2008아시아보디빌딩&휘트니스 선수권대회(7월 16~20일)’의 예선을 앞두고 국가대표 코칭스태프의 일원을 맡은 B 씨가 포즈 지도에 나섰다. 장소는 A 선수와 C 선수가 함께 쓰는 방. 선수들의 복장은 경기복, 즉 비키니 차림이었다. B 씨는 먼저 C와 A 선수를 차례로 지도하면서 노골적인 성추행을 했다고 A 선수는 말한다. B 씨는 또한 6월 말 미즈코리아 대회와 관련된 판정 시비 얘기를 꺼내며 “한국 보디빌딩계에서 내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가, 나한테 밉보이면 절대 한국 보디빌딩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식의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B 씨는 여자 선수들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고, 특히 몸의 중요 부분만 가린 경기복 안으로 손을 집어 넣기도 했다. C 선수에게는 “네가 왜 미즈코리아 대회에서 D에게 졌는지 아는가? 바로 이 엉덩이에 비계가 많기 때문이다”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퍼부었다고 한다. 이런 엽기적인 ‘지도’는 밤 12시가 넘도록 계속됐으며 충격을 받은 두 선수는 지도가 끝난 후 울음을 터트렸고, 특히 A 선수는 경기 당일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을 대표해서 국제대회에 나간 임원의 행동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래서 대놓고 물었다. “왜 현장에서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답변은 스포츠 현장의 여자선수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줬다. “깜짝 놀라면서 ‘왜 이러시느냐’고 쳐다봤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눈을 부라리면서 응수했고, 워낙 위협적인 멘트와 함께 성추행을 한 까닭에 적극적인 저항이 힘들었다”고 했다.
심지어 국내 대회 판정 시비를 제기한 A 선수를 국제대회에서 매장시키려고 하는 의도까지 엿보였다고 한다. 국제적인 추세와는 동떨어진 포즈를 가르쳤고, 심지어 성추행의 충격으로 머리가 아프다는 선수에게 결선 전날 자신이 갖고 있는 두통제를 먹으라고 권하기도 했다. 보통 보디빌더들은 도핑테스트 때문에 감기약도 함부로 먹을 수 없다. B 씨는 A와 C 선수의 지도 이전에 휘트니스 종목에 참가한 다른 두 여자선수도 개인지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A 선수는 국제전화를 통해 성추행 내용을 가족들에게 알렸고, 7월 21일 선수단이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했을 때 A 선수 측 사람들이 강력하게 항의하는 대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한보디빌딩협회는 당초 공항에서 진행할 예정인 공식 해단식도 치르지 못했다.
정신과 진단서를 발급받은 A 선수는 B 씨를 종로경찰서에 성추행 혐의로 고발했고,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단체에도 진정서를 넣어 향후 사태는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 지난 6월 27일 열린 2008 미즈코리아 선발대회. 유망주로 꼽혔던 D 선수는 입문한 지 불과 50일 만에 우승을 차지해 판정 시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
성추행 사건의 취재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건을 접하게 됐다. 6월 27일 수원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08년도 미스터&미즈코리아’ 대회. 보도가 안 되어서 그렇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즉, 예상을 깨고 체급(-55kg급) 우승에 이어 그랑프리에 해당하는 미즈코리아로 선발된 D 선수는 보디빌딩 입문 후 불과 50일 만에 한국 최고의 여자 보디빌더가 된 것으로 확인됐다.
D 선수는 태권도 출신으로 지난 5월 7일 A 선수와 만나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반인이 봐도 군살이 많은 평범한 체형이었다. 아무리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또 50일 동안 지옥훈련을 했다고 해도 50일 만에 인구 5000만 명의 나라에서 최고의 ‘몸짱’이 됐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소가 웃을 일이다. 한 보디빌딩 전문가는 “두 가지는 명확하다. D는 전체 우승자임에도 불구하고 도핑테스트에서 빠졌다. 그래서 우승 직후 약물 의혹을 받았다. 오해를 풀려면 지금이라도 혈액으로 도핑테스트를 하면 진실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50일 만에 한국 최고의 보디빌더가 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보디빌딩은 존재 가치가 없는 종목이 되고 만다. D 선수는 근육이 아닌 얼굴로 미즈코리아가 된 것이다. 판정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고 개탄했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인 까닭에 기자가 직접 확인할 결과, D 선수가 도핑테스트에서 빠진 게 확실했다. A 선수가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B 씨도 심판진에 참여했었다. 여성미를 강조했다는 판정기준도 세계적인 추세와는 맞지 않았다.
어쨌든 10년 동안 운동을 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미즈코리아에 신인인 D 선수가 뽑힌 이후 대한보디빌딩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항의성 글이 쇄도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심지어 수상 당시 스스로도 놀라는 눈치가 역력했던 D 선수는 파장이 커지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기도 했다. D 선수에 대해 ‘골격이 좋아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였는데 오히려 미즈코리아 선발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는 동정론까지 나오고 있다.
#선수 생명 건 진실게임
B 씨와는 어렵게 통화가 됐다. 당초 A 선수처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할 계획이었지만 B 씨는 “어떻게 내 휴대폰번호를 알았느냐”며 항의부터 했다. “성추행 사건과 미즈코리아 판정 시비에 대해 당사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요청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 현재 쌍방이 맞고소를 한 상태로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 인터넷미디어가 A 선수의 입장만 보도했다”는 얘기에 기자가 “공정한 보도를 위해 충분히 의견을 듣겠다”고 요청했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다. 알아서 하라”는 냉랭한 답변이 돌아왔다.
▲ 2008 미즈코리아 1위에 등극한 D 선수. | ||
보디빌딩협회는 8월 4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창용찬 이사의 설명과 같은 취지의 공식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협회는 지난 7월 24일 대한체육회 감사실로부터 미즈코리아대회 심판판정과 관련해 행정 방문을 통한 감사를 받기도 했다.
<일요신문>이 KADA에 문의한 결과 기본적으로 도핑테스트 선정은 KADA가 임의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미즈코리아 대회 때는 국제대회에서 증빙 서류가 필요한 국가대표선수를 위주로 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D 선수가 빠졌다는 것이다. 어느 종목이든 도핑테스트는 대상자를 임의로 선정하지만 통상 1위 선수나 혹은 단기간에 기량이 급상승한, 즉 의심이 가는 선수를 우선적으로 하는 게 보통이다. D 선수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 의혹이 거세지고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혈액검사를 하면 명쾌하게 진위 여부를 밝혀낼 수 있지만 보디빌딩협회와 KADA 측은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또 비록 A 선수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성추행 당사자이자 결정적인 증인인 C 선수는 홍콩 현지에서 한국의 한 보디빌딩관계자와의 통화에서 A 선수의 주장과 일치하는 내용을 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A 선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진실 규명을 위해서라면 실명은 물론이고 얼굴 공개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여성의 존엄성과 선수 생명까지 건 40대 ‘몸짱’의 폭로와 한국보디빌딩 최고 단체와의 진실게임. 충격의 이번 사건은 경찰의 수사와, 이어지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진실을 밝히게 됐다.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예단을 할 수는 없지만 지는 쪽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것은 물론이고, 민형사상의 처벌까지 받게 될 전망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