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줄은 포기해도 야구는 포기 못해!
▲ 최근 일본서 열린 제3회 여자야구 월드컵대회에서 한국 여자야구대표팀이 감격의 첫 2승을 거두며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 주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엔트리에 포함된 18명 선수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신기하다 못해 재미있을 정도다. 카레이서, 체육교사, 사법고시생, 정보산업 컨설턴트 등 참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사회생활을 하며 주말을 이용해 여자야구 동호회에서 활동하다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참가한 그들한테 이번 월드컵대회의 경험은 핸드볼의 ‘우생순’을 능가한다.
9박10일간 진행된 대회를 위해 다니던 회사에 휴가와 연월차를 내고 어렵게 참가한 선수들이 있는가하면 몇몇 선수들은 회사에서 휴가를 허락하지 않자, 아예 사표를 제출하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태극여전사들 중 5명을 만나 ‘그들만의 리그’를 들어봤다.
지난 6일, 서울 봉천동에 있는 인헌초등학교에서 만난 여자야구대표팀 선수들. 서혜진(34·부천여고 체육교사) 홍은정(29·생활체육지도자) 박수정(24·사법고시생) 김수진(30·사진앨범제작) 최수정(34·SKC&C) 씨 등은 각각 여자야구동호회 소속 선수들이다. 이번에 대표팀 생활을 통해 더욱 진한 동료애를 나눈 그들은 인터뷰 내내 자신들의 야구 열정과 야망을 가감없이 표출시켰다.
간단한 소개부터
서혜진(인천 해머스스톰 소속, 이후 서): 전 대표팀에선 2루수를 보고 소속팀에선 유격수를 서고 있어요. 소프트볼 선수로 활약하다가 그만두고 체육교사로 활동하던 중에 2006년 해머스스톰이 창단될 때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됐어요. 결혼요? 당연히 못했죠. 그래도 대표팀에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선배(김주현 씨·39세·대표팀 주장)가 있었기 때문에 최고참은 아니었어요. 대표팀과 소속팀의 포지션이 왜 다르냐구요? 포수했던 사람이 투수도 하는 걸요. 멀티플레이어, 포지션 파괴 등은 여자야구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이죠(웃음).
홍은정(나인빅스 소속, 이후 홍): 저도 소프트볼 선수 출신이에요. 생활체육을 전공한 탓에 여자야구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번 월드컵대회 도중에 수비를 보다 상대팀 선수와 부딪히는 바람에 부상을 당했어요. 이 정도의 부상은 흔히 있는 일인데요 뭘. 이번에 주장 언니는 공에 얼굴을 맞고 치아가 부러지고 볼이 퉁퉁 부어올랐는 데도 다음날 경기에 뛰겠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우리들한테 이런 부상은 별스런 일도 아니에요.
박수정(‘수’ 팀, 이후 박): 성균관대 법학과 3학년에 다니다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전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부에서 활동했거든요. 대학에서도 야구 동아리에 들어가 선수로 뛰었구요. 물론 남자 애들이랑 같이 어울려서죠. 현재 고시 준비 중이고 지금도 신림동에 있다가 왔어요. 제가 나름 대표팀의 에이스였는데 대회 전에 너무 오버페이스를 하는 바람에 정작 대회 때는 등판조차 못했어요. 컨디션 난조로. 감독님과 선수들한테 너무 미안했는데 (김)수진 언니가 잘해주는 바람에 2승을 챙길 수 있었어요.
김수진(경기 울타리플라워즈 소속, 이후 김): 제가 팀에선 포수였거든요. 대표팀에선 3루수를 보기로 하고 참가했던 건데 (박)수정이의 부상으로 제가 마운드에 올라간 거예요. 승수를 챙기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다행히 이전에 투수를 했던 경험이 이번 대회에서 좋은 영향을 발휘했던 것 같아요.
▲ 박수정(왼쪽), 최수정 | ||
월드컵대회의 추억
박: 아,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전문 투수로 뽑히고도 등판을 못했으니 할 말 없죠. 정말 잘하고 싶은 마음에 너무 연습을 많이 했던 게 탈이었어요.
서: 연습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지방에 있는 선수들은 평일에 모이기가 힘들잖아요. 18명의 선수들이 다 모여서 연습한 건 서너 번밖에 안 됐을 거예요.
홍: 이번 대회는 성인규격으로 치러졌어요. 그런데 현재 우리가 뛰고 있는 사이즈는 성인규격보다 작거든요. 공 크기도 다르구요. 그걸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마운드와 타석과의 거리부터 베이스간의 거리 등 다 달랐어요. 공도 어찌나 한참 있다 오는지…(웃음).
김: 공 크기가 틀리면 투수 입장에선 스피드나 제구력에 엄청난 차이가 생겨요. 피칭 연습도 제대로 못했는 데다 갑자기 등판 명령을 받고 마운드에 올라섰더니 어찌나 떨리던지, 그래도 홍콩이나 인도팀이 못하는 바람에 우리가 2승을 챙길 수 있었어요.
우리가 야구를 하는 이유
최: 이번에 월드컵대회에 참가하면서 회사에다 여름휴가와 연월차를 포함해서 휴가서를 냈어요. 당시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제가 빠지기가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회사 눈치보면서 출국 전까지 매일 야근을 했어요. 그래도 힘든 줄 모르겠더라구요.
박: 전 어렸을 때부터 평범하게 살았던 적이 없었어요. 남들과 다르게 사는 삶을 좋아했거든요. 부모님은 고시 준비하며 야구에 빠져 있는 날 쉽게 이해 못하실 때도 있겠지만 제가 공부만 하면 좀이 쑤신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모른 척하시는 것 같아요. 전 고시 패스하면 연수원에서 야구동아리를 만들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미 야구팀이 있다는 소릴 듣고 진짜 흥분했어요. 사법연수원의 야구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서라도 고시엔 꼭 합격해야겠죠?
홍: 전 직업이 워낙 ‘운동권’이라 야구와 인연을 맺는데 큰 부담이 없었어요. 시간 빼는 것도 어렵지 않았구요.
김: 이번에 무리하게 휴가를 쓰는 바람에 곧 회사에서 잘릴지도 몰라요(웃음). 직장은 포기할 수 있어도 야구는 포기가 어려워요. 회사는 잘리면 다른 곳을 알아볼 수 있지만 야구는 그런 대상이 아니거든요. 사실 사회 생활하면서 야구선수로 생활한다는 건 많은 부담과 한계 상황들에 부딪히게 돼요. 더욱이 우릴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엄청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열정적으로 응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가 재밌어요. 저한테 야구할래?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래? 라고 물으면 당연히 야구를 택할 겁니다.
여자야구와 프로야구
박: 다른 건 하나도 안 부러운데 전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이 부러워요(일동 폭소). 이상하게 상상하지 마세요. 전 그들의 하드웨어가 부럽다는 뜻이니까. 제가 만약 그들의 몸처럼 좋은 하드웨어를 갖추고 있다면 경기 내용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제일 이상적인 ‘몸’은 SK 김광현 선수인 것 같아요. 김광현이 안산공고에서 뛸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고교야구대회를 보러 갔는데 전날 연장까지 던지고 다음날 또 다시 선발로 나와 최고의 피칭을 하는 걸 보고 ‘저 선수가 인간이야? 기계야?’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대단한 투구였어요.
▲ 왼쪽부터 서혜진, 홍은정, 김수진 | ||
서: 전 주거지가 인천이다보니 SK 선수들 대부분을 좋아해요. 특히 올림픽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준 정근우 이진영 정대현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홍: 한화 추승우 팬이에요. 외야 본능이라고나 할까(웃음). 선수들끼리 야구장에 자주 가요. 많은 팬들 앞에서 멋진 승부를 펼치는 선수들을 보면 완전 부러워요. ‘우린 언제쯤 저렇게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질 때도 있죠.
그렇다면 결혼은? 애인은?
최: 여자야구에 불문율 같은 게 있어요.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여자야구를 시작하면 틀림없이 깨진다는 사실. 애인이 없는 사람이 여자야구를 시작할 경우 결혼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서른네 살인 데 남자친구가 없다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있으면 야구하는 데 방해만 될 것 같아서.
서: 저도 만만치 않은 나이지만 별로 아쉽지가 않아요. 그냥 이렇게 싱글로 지내면서 주말에 야구할 수 있는 자유가 좋아요.
박: 전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겠어요. 남자친구보다 더 좋은 야구가 있는데 딴 생각이 나겠어요?
김: 더 물어봐도 거의 같은 대답일 거예요. 이성 만나는 게 더 좋았다면 야구를 하겠어요?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서: 이번 월드컵대회에서 올린 성적이 제가 야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좋았어요. 타율이 6할5푼이었거든요. 2승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 정말 기분 좋았구요, 아마도 제 인생에서 그 대회가 최고의 대회로 꼽힐 것 같아요.
홍: 전 야구를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돼서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어요. 그래도 이번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참가해서 많은 선수들을 만나고 여러 팀과 경기를 하면서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었어요. 저한텐 일본에서 보낸 시간들이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김: 이번에 홍콩전에서 첫 승을 올렸어요. 첫 승의 감격이 정말 짜릿하더라구요. 그때는 김광현 선수도 부럽지 않았어요. 마지막 투구가 안타가 되나 싶었는데 중견수가 잡아내는 거예요.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박: 제가 야구를 시작한 계기가 안향미 선수 때문이었거든요. 우리나라에 여자야구의 존재감을 심어준 분이잖아요. 이 선수가 썬라이즈라는 팀에 소속돼 있는데 제가 그 팀을 상대로 완투패를 당하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건 안향미 선수를 삼진으로 잡았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으로 여자야구를 통해 그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태극 여전사’들 답게 그 메시지는 크고 원대했다. 그들은 돈과 명예를 원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푹 빠져있는 여자야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장소와 환경이 제공되길 소원했다. 여자야구 전용 구장과 여자야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인프라 구축, 그리고 여자야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좀 더 따뜻하고 열려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회비를 모으고 그 회비로 팀을 운영하고 대회에 참가하는 여자야구 선수들. 그들의 열정과 도전 정신은 야구에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