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린에 한국 입김 ‘팍팍’
▲ 미LPGA 국제담당 선수이사에 출마한 정일미. 사진은 정일미와 지구 사진을 합성한 것. | ||
커미셔너 못잖은 영향력
미LPGA의 최고기관은 커미셔너가 아니라 이사회(the LPGA Board of Directors)다. 커미셔너는 집행기관인 사무국을 이끄는 총책임자일 뿐 최고 권력은 이사회에 있는 것이다. 미LPGA 선수들 사이에서 “이사가 커미셔너보다 더 높은 자리”라는 말이 나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LPGA 이사회는 총 11명으로 구성된다. 독립된 신분인 6명의 개인과 선수협의회(the LPGA Player Executive Committee) 소속 3명, LPGA 티칭앤클럽프로페셔널단체 회장, 그리고 당연직으로 커미셔너가 포함된다. 이 중 선수협의회 소속 3명을 선수이사(player director)라고 말한다. 선수이사는 의결권은 없지만 현역선수라는 특성상 이사회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가진다. 한국선수로는 펄 신과 박지은이 한 차례씩 선수이사를 지낸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정일미가 도전하는 선수이사는 의미가 한층 뜻깊다. 미LPGA에서 외국선수(인터내셔널 플레이어)의 비중이 50%에 달하고 있는 시점에서 기존 3명의 선수이사 중 한 명을 국제담당으로 뽑기 때문이다. 이 선수이사는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의 LPGA 선수를 대표한다. 업무도 한국 일본 유럽 호주 등 각국 출신의 선수와 또 해당 국가 골프협회와의 협조 문제를 다룬다. 여기에 국제담당 선수이사는 LPGA 선수협의회 부회장이기도 하다(현재 회장은 힐러리 런키).
이렇듯 이전에 비해 한층 강화된 국제담당 선수이사직인 까닭에 마리 맥케이, 미셸 엘리스 등 유럽의 쟁쟁한 선수들이 출마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최다 인원을 자랑하는 한국선수들을 대표해 ‘맏언니’ 정일미가 나온다는 소식에 이들은 이미 출마를 포기한 상태다. 오는 15일(한국시간) 하와이 마우이에서 카팔루아 LPGA클래식에 앞서 실시되는 선거 때 현장에서 후보가 나오지 않는 한 정일미의 당선이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정일미가 한국선수단의 맏언니일 뿐 아니라 미국 및 타국 선수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고, 또 결정적으로 커미셔너인 캐롤린 비벤스가 인정하고 있다는 점도 ‘정일미 선수이사 대세론’을 굳히고 있다. 실제로 정일미는 얼마전 비벤스로부터 “국제담당 선수이사에 출마하면 어떻겠냐”는 요청을 직접 받았다. 비벤스는 정일미가 논리적인 언변과 뛰어난 친화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정일미는 한국 최고의 선수로 활약하다가 국내의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서른을 넘긴 2004년에 미국투어에 뛰어들었고, 올해까지 5년째 쉼 없이 미LPGA투어를 뛰고 있다. 우승은 없지만 꾸준한 성적으로 투어카드를 유지하며 한국선수 중 맏언니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정일미는 9일 <일요신문>과의 국제전화에서 “아직 만족할 만한 성적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주제넘게 스스로 출마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 후배들과, 비벤스 커미셔너, 그리고 외국선수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많은 요청을 받았다. 아직 당선이 확정되지 않아 소감을 밝히기 어렵다. 대신 기본적으로 이제는 세계인의 투어가 된 미LPGA의 각종 현안을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이라며 출사표를 던졌다. LPGA선수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이번 국제담당 선수이사는 임기가 3년이다.
“한국선수들 미안합니다”
정일미는 비벤스로부터 국제담당 선수이사 출마 제의를 받으면서 ‘영어사용 의무화 파문’과 관련해 사과를 받았다고 밝혔다. 정일미는 “비벤스 커미셔너가 영어사용 의무화와 관련해 본의 아니게 주타깃이 돼 마음고생이 심했던 한국선수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 솔직히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을 한국선수들에게도 전달했다”고 소개했다.
미LPGA 사무국은 지난 8월 20일 세이프웨이클래식 대회 현장에서 주로 한국선수들을 모아놓고 영어테스트를 실시, 일정 기준에 못 미치는 경우 투어카드를 박탈하겠다는 ‘영어사용 의무화 방침’을 발표했다. 이 같은 발언이 나오자 골프선수들은 물론 미국내 언론과 정치권에까지 큰 반발이 일었고 심지어 인종차별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모욕적이고 자멸적인 행위’라고 비난했고, 협찬사를 위한 조치였다는 LPGA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협찬사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여기에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상·하원 의원들이 법적 대응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에 LPGA는 2주 만인 지난 9월 5일 영어사용의무화와 관련된 벌칙규정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선수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라고 공식발표는 했지만 한국선수들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한국선수들은 ‘영어 파문’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미LPGA에서 한국선수들의 위상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로 이어졌고, 특히 정일미가 전세계 선수를 대표하는 미LPGA의 국제담당 선수이사에 출마하게 된 것은 큰 자랑거리라며 크게 반기고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