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이 발끝에 쩍쩍 붙어요”
▲ 사진=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왼쪽),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23일 저녁, 대구월드컵경기장 인근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근호는 ‘행복한 남자’라는 기자의 수식어에 “행복함을 느끼기 이전에 부담이 더 크다”며 어른스런 면모를 내보였다.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만큼 소속팀에서도 더 나은 플레이를 해내야 한다는 ‘숙제’ 때문이었다.
비록 스물세 살의 나이 어린 청년이었지만 이근호의 축구인생은 드라마틱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사연과 눈물, 땀으로 뒤섞여 있었다.
인터뷰 이근호를 인터뷰하기 전에 그에 대한 자료 검색을 시작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인터뷰 기사들마다 그 내용이 엇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등학교 때가지만 해도 ‘정말’ 잘나가는 축구선수였던 그가 프로 입단(인천) 후 3년여를 2군에서 보냈던 부분, 그리고 2군 선수 출신으로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에 첫 승선했다는 사실이 더욱이 대구FC로 이적 후 드디어 주전 선수로 자리 잡고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된 스토리 등은 기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부분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보니 나에 관한 기사 내용이 비슷비슷하다. 그래도 인터뷰 자체는 즐겁다. 이전엔 이런 기회조차 없었고 인터뷰하는 선수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아니 인터뷰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실력을 보여준 선수들이 부럽고 질투가 났었다.”
팀워크 이근호의 절대 가치를 확인시켜준 지난 15일, 2010 월드컵 아시아 B조 예선전 아랍에미리트전에서 이근호는 선제골과 추가골을 터트리며 한국이 4-1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이근호는 “2골을 넣었던 우즈베키스탄과의 평가전이 끝나고 걱정이 많았다”면서 “실전 경기인 아랍에미리트전에서 평가전처럼 골이 나오지 않을 경우 욕을 많이 먹을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2-0으로 앞선 상태에서 전반전이 끝나고 기분 좋은 상태에서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허정무 감독님이 선수들의 기분을 눈치채셨는지, ‘2-0이란 스코어는 경기 중에 한순간의 방심으로 쉽게 뒤집어질 수 있는 점수니까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수비 실책으로 한 골을 먹게 됐는데 이때 분위기가 침체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서로 ‘괜찮다’, ‘정신차리자’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 모인 대표팀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면 ‘한마음’ ‘단단한 팀워크’였다.”
소통 이근호는 전체적인 전술의 변화보다도 대표팀 내 선후배들 간의 의사소통이 잘 됐던 게 경기장에서 절묘한 호흡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정)성훈이 형과는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호흡을 맞춰본 게 전부였다. 그런데 경기 전에 성훈이 형이랑 미리 약속을 했다. 한 사람이 볼을 키핑하면 한 사람은 안쪽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한 사람이 볼을 잡고 있으면 한 사람은 수비수를 흔들어 놓는다는 등의 약속된 플레이가 실제로 큰 도움이 됐다. 내 플레이 스타일이 침투해가면서 배후를 노리는 스타일이라 볼 키핑력이 있고 볼을 점령해줄 수 있는 선수와 호흡이 맞는 편인데 성훈이 형은 그런 점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 사진제공=대구FC | ||
“아, 이런 질문에는 정말 대답 잘해야 하는데…(웃음). 남일이 형이 무뚝뚝함과 카리스마로 대변되지만 실제 선수들과의 생활에서도 그런 면만 내세우는 건 아니다. 훈련 끝나고 숙소에선 가급적이면 후배들과 같이 어울리려고 하고 식사도 후배들 테이블에서 주로 먹는다. 외모완 달리 마음이 따뜻한 형이다. 지성이 형도 이번 대표팀에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준 주장이다. 대화와 소통을 중요시한 덕에 선수들 의견이 코칭스태프에 잘 전달됐고 선수들도 마음 편히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앞으로 누가 주장이 되든 상관없을 것 같다. 두 선배 모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근호는 주장은 선수들을 이끌고 코칭스태프에게 정확히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선수’가 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도전 앞에 설명한 대로 이근호는 올림픽대표팀에 뽑히기 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무명의 선수였다. 아무리 2군리그에서 MVP로 뽑히며 주가를 드높였다고 해도 그의 존재는 결코 빛나지 않았다.
“처음엔 좌절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1군에서 날 불러주지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내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깊은 슬럼프에도 빠졌었다. 2군에서 MVP까지 받고 나면 뭔가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세상은 변하질 않았다. 우연히 대구FC에서 나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당시만 해도 난 변화가 절박했고 날 인정해주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었다. 결국 2007년 대구FC로 이적 후 드디어 ‘날개’를 달 수 있었다. 그 ‘날개’를 달게 해주신 분은 변병주 감독님이셨다.”
2006년 11월 베어벡호의 올림픽대표팀에 2군 출신의 이근호가 발탁되자 축구계에선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1군 출신, 그중에서도 K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젊은 선수들이 모인 올림픽대표팀에 단 한 명의 2군 선수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처음엔 많이 위축되고 긴장도 됐다. 다행히 청소년대표팀 시절 같이 뛰었던 선수들도 있었고 비슷한 또래들이 모인 탓에 금세 대표팀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다. 비록 주전도 아니고 리저브 멤버로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거나 기죽진 않았다. 내가 (올림픽대표팀에) 뽑혔던 건 아시안게임의 대표팀 일정이 겹쳐 선수들이 모자란 상황에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엔 뽑힌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고 태극마크를 달고 벤치에 앉은 것 자체가 ‘꿈’같았다. 그래서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를 놓치기 싫어 독기 품고 뛰어다녔다. 어떻게 해서든 감독 눈에 들고 싶었고 다음에 또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궁합 핌 베어벡 감독이 올림픽대표팀과 국가대표팀에 이근호를 세웠다면 K리그에선 소속팀의 변병주 감독이 이근호를 재탄생시켰다. 변 감독 입장에선 저돌적이고 빠른 플레이를 펼치는 이근호가 대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와신상담 끝에 인천에서 이근호를 데려올 수 있었다.
“감독님이 청구고 감독을 맡으셨을 때 난 라이벌로 꼽힌 부평고에서 주전으로 뛰며 청구고의 박주영과 대립각을 이뤘다. 이때 감독님이 날 잘 보셨던 것 같다. 대구에서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됐는데 이전 얘기를 하시면서 잘 왔다고 반겨주시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평고까지 절친하게 지낸 (하)대성이랑 같은 방을 쓰게 하시며 배려해주셨고 팀에 빨리 적응하도록 세심하게 신경써주셨다. 감독님과는 단순히 감독과 선수 사이를 떠나 마치 큰 형님 같은 존재다. 나한테는.”
▲ 박주영(왼쪽), 이근호. | ||
“만약 인천에서 수도권팀으로 이적했다면 과연 내가 지금처럼 마음 편히 운동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워낙 인천에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당시 나한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건 관심과 따뜻함이었다. 대구는 그런 점에서 날 제대로 대우해줬다.”
연봉 이근호는 올시즌을 앞두고 대구FC와 재계약하는 과정에서 약간 잡음이 불거진 바 있다. 처음엔 연봉에 관한한 구단에 일임하겠다고 말했지만 협상 과정에서 에이전트와 구단측의 몸값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나름 소신껏 의사 표현을 했다가 팀을 옮기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것.
“전혀 사실과 다른 기사가 나가는 바람에 맘 고생이 심했다. 팬들로부터 실망했다는 소리도 듣고 어린 나이에 돈만 안다는 이상한 비난도 들었다. 난 단 한 번도 대구를 떠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감독님도 날 굳게 믿고 계셨기 때문에 협상 중에 계약과 관련해선 일체 얘길 나누지 않았다. 그때 새삼 사회가,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올시즌 1억 9000만 원을 받은 이근호가 내년에는 어느 정도의 몸값을 올릴 수 있을지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미 한 차례 연봉과 관련해서 몸살을 앓았던 그는 이번엔 에이전트에게 맡기고 절대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친구 청소년대표팀과 올림픽, 국가대표팀을 거치며 여러 명의 85년생을 만났다. 이렇게 해서 만든 조직이 ‘85년생들 모임(가칭)’이다. 회장, 부회장, 총무 등 임원들과 회원들로 이뤄진 선수들이 10여 명을 넘는다.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고 있는데 지금은 울산현대의 오장은이 조직의 ‘보스’다. 박주영(AS모나코) 김승용(광주상무) 이근호 등이 주요 인사. 그중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라이벌로 꼽혔던 박주영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주영이를 보면 부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운동장에서 노련미와 여유를 보여준다. 경기장에서 선수들을 이끄는 스타일이다. 난 아직 여유도 노련미도 없다. 단 많이 움직이면서 내 자리를 찾아가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는 편이라 주영이와는 차이가 있다. 올림픽대표팀에서 주영이와 투톱을 이루기도 했는데 친구면서도 동료 선수였고 또 나와 경쟁을 이루는 등 서로 자극을 주고 받는 것 같다.”
잘나가는 축구선수와 인터뷰하다보면 한번쯤 묻고 넘어가는 질문이 있다. 바로 해외진출 문제다. 이근호는 성격답게 말만 앞세우지 않을 것 같다. 화려한 빅리그 진출을 소원하기 보단 벨기에, 네덜란드리그 등을 거쳐 단계를 밟아 올라가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게 아니지 않나. K리그나 대표팀에서 내 몫을 다하고 있으면 언젠가 좋은 소식이 들릴 것이라고 믿는다. 외국 진출했다가 실패해서 돌아온 선배들을 보며 느끼는 부분이 많다. 마음만 앞세우기보단 현실에 충실하면서 내 실력을 키우는 게 나한테는 더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