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브랜드와 대기업 편의점 땅속 장악 ‘제2 정운호 나올까’
소상공인의 ‘텃밭’이던 지하상가 상권은 유명 화장품업체 간 입점 경쟁이 불붙으며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하철 운영 주체인 서울메트로(1~4호선)와 서울도시철도공사(5~8선)는 각각 최고가 경쟁 입찰 방식을 통해 수백여 곳의 상가 임대를 주고 있다.
이른바 ‘법조 게이트’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는 지하철 상가 사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2003년 론칭한 더페이스샵은 화장품 브랜드 가운데 최초로 지하철 역사에 입점했다. 이는 당시 업계 ‘후발주자’였던 더페이스샵의 인지도가 단기간에 오를 수 있던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정 대표는 2010년 신규 브랜드 네이처리퍼블릭을 론칭하면서도 지하철 점포 확대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하철 상가 사업은 풍부한 유동 인구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다. 서울 방배역의 네이처리퍼블릭 매장.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검찰은 ‘법조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브로커 이민희 씨가 정 대표로부터 서울메트로 지하철 입점 로비 등을 위해 모두 9억 원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 씨는 돈을 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로비 의혹에 대해선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메트로 홍보실 역시 “서울메트로 직원의 금품 수수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사건 관련자들이 로비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검찰 수사가 끝나기 전까지 혐의를 완벽히 벗기는 어려워 보인다. 네이처리퍼블릭 법률대리인인 최운식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는 “수사가 진행 중이라 코멘트할 수 없다”고 했다.
정 대표가 입점 로비를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 2009년은 각 화장품업체 간 점포 확장이 치열할 때다. 서울도시철도공사 부대사업처 고위 관계자는 “화장품업체 간 입점 경쟁은 2013년 무렵 정점을 찍었다”며 “경쟁이 과열되다 보니 상가 평균 임대료도 높아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정 대표는 2010~2011년께 서울도시철도공사 최고위직을 상대로 한 입점 로비 의혹에 휩싸였지만 검찰은 무혐의로 종결한 바 있다.
지난 4월 28일 이정훈 서울시의원(더불어민주당)이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받은 ‘2012~2016년 서울지하철 상가 계약 현황 자료’ 등에 따르면 이 기간 네이처리퍼블릭은 서울메트로로부터 3년 임대 조건에 333억여 원을 지불하는 상가 계약(안국역 등 73곳)을 따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와는 5년 임대 조건에 164억여 원 규모의 계약(강남구청역 등 19곳)을 했다.
만약 이들 매장의 매출 대비 임대료 비중이 20%라고 가정하면 네이처리퍼블릭은 계약 기간 동안 약 2500억 원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역 소재 편의점의 매출 대비 임대료 비중은 약 19%다. 화장품 매장의 관련 통계는 따로 집계되지 않았다.
서울메트로 입점 로비 의혹이 제기된 배경은 각 화장품 브랜드가 경쟁적인 점포 확장을 벌인 데 있다. 화장품 업체 간 입점 경쟁과열로 상가 평균 임대료는 수직상승했다. 일요신문 DB
네이처리퍼블릭의 경쟁사인 에이블씨엔씨(미샤)는 서울메트로와 68억여 원 규모의 임대 계약(잠실역 등 16곳)을 맺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와는 세 차례에 걸친 ‘브랜드 임대’ 등 계약으로 378억여 원을 지급하기로 약정했다. ‘브랜드 임대’는 수십 개의 점포를 그룹으로 묶어 판매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밖에 더페이스샵은 2호선 홍대입구역, 5호선 왕십리역 등에 출점하는 조건으로 양 공사와 55억여 원 상당의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토니모리는 2014년 4~5월 5호선 송정역 등에 신규 입점하며 9억여 원을 지급하기로 계약했다. 아모레퍼시픽도 2호선 잠실나루역 상가 임대 과정에서 1억 9000여만 원을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몇 년 사이 지하상가 내 화장품 브랜드가 과밀한 까닭에 향후 전망에 대해선 부정적인 목소리가 작지 않다. 양 공사 부대사업처 담당자는 한 목소리로 “업황이 예전 같지 않다”고 전했다. 앞서의 고위 관계자는 “화장품업이 잘 되면서 한 역사에 3곳의 브랜드가 입점하기도 했는데 공급 과잉으로 당시 각 업체가 서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했다.
화장품업과 함께 지하상가 시장을 양분한 업종은 ‘편의점’이다. GS리테일은 2013년 10월 ‘6, 7호선 지하철 역사 내 유휴공간 개발 사업자’로 선정되며, 그 계약가로 941억 원을 지출했다. 이 계약에 따라 GS리테일은 2018년 10월까지 6, 7호선 유휴 상가를 다른 사업자에게 임대하거나 편의점 형태로 직영할 수 있게 됐다. GS리테일 관계자는 “지하상가에서 거두고 있는 정확한 수입 내역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GS리테일은 3호선 압구정역 등에도 직영 편의점(GS25)을 갖고 있다.
5호선은 세븐일레븐 사업자 코리아세븐이 2012년 10월 전 구간에 대한 입찰을 따냈다. 계약 기간은 5년, 계약금은 261억 6500만 원이다. 코리아세븐은 2012~2016년 2호선 서초역 등 10곳의 계약을 따내며 33억여 원을 추가 지출했다. 서울메트로는 이들 외에 CU 사업자 BGF리테일, 미니스톱 등과 31억~36억 원 규모의 단일 계약을 맺었다. 서울메트로 부대사업처 담당자는 “개인명의 임대업자 중에도 편의점 가맹업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밝혔다.
대형 편의점업체가 지하철 상가를 장악하면서 일각에선 ‘대기업 특혜’를 의심한다. 최근 신세계 계열 편의점인 ‘위드미’는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라딘커뮤니케이션의 컨소시엄에 포함돼 8호선 잠실역(Street Mall) 입점을 앞두고 있다. 위드미 옆에는 GS그룹 계열 드러그스토어인 ‘왓슨’이 출점한다. 컨소시엄은 입찰 당시 5년 임대 조건으로 88억여 원을 써냈다.
이에 대해 서울도시철도공사 측은 “개별 상가보다 브랜드 상가의 선호도가 높은 시민들의 의견과 브랜드 점포 확대를 통한 수익 극대화 측면을 동시에 고려한 것”이라고 답했다. 서울메트로 측 역시 “특정 대기업에 대한 특혜는 있을 수 없다”며 “모든 입찰은 공공자산 온라인 처분시스템인 온비드를 통해 투명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법조 게이트’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사진)는 지하철 상가 사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실제 ‘맥킨지 보고서’는 홍콩 MTR 등의 사례를 들어 “브랜드 점포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콩 MTR은 역내 공간을 100% 법인사업자에게 임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맥킨지 보고서’는 패스트푸드 브랜드, SPA 의류 브랜드, 기업형 슈퍼마켓의 신규 유치를 권유했다. 지하철의 막대한 집객 효과를 활용해 유명 브랜드를 입점시키라고 제안한 것이다.
멕킨지 보고서 발표 직후 SPC그룹 계열의 파리크라상과 비알코리아, MPK그룹, 브레댄코 등이 연이어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화장품 부문 주도 시장이 유통·식품 부문으로 재편된 셈이다. 쇼핑 등 편의시설 부문의 확장 또한 눈에 띈다. 패션업체 엔터식스는 올 3월부터 10년간 3호선 고속터미널역 지하상가를 위탁 운영하는 조건으로 입찰가 300억 원을 써냈다. 114개 역사에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설치한 노틸러스효성은 5년 간 98억 원을 지급하기로 계약했다.
‘전국 매장 수 1위’ 등 외형에 주력하는 기업에 지하철 상권은 진입장벽이 낮은 ‘기회의 땅’과 마찬가지다. 정 대표는 이를 파고들어 많은 이윤을 남겼다. 입찰 로비 및 특혜 시비 등에도 지하상가 사업이 주목받는 이유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